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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의 MZ칼럼]불안을 학습한 세대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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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늦깎이 학생으로 로스쿨을 다니던 시절이다. 나는 돈이 아까워 캔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함께 공부하던 이십대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매일 50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요.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 것 같거든요." 다들 돈도, 시간도, 여력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일종의 사치였다. 그런데 그는 약간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 만큼은 잃고 싶지 않아 했다.


수험생활이라는 건 마음을 끊임없이 배반 당하는 시절이다. 시험문제에 나올 줄 알았던 게 나오지 않고, 외운 줄 알았던 게 기억나지 않고, 애쓴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쓴 게 답인 줄 알았지만 답이 아니고, A를 받거나 80점을 받고 싶었지만 B를 받거나 50점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급속도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믿으며 의욕이 꺾이기도 한다.

그럴 때 사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은 어떤 통제감을 돌려준다. 이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커피를 주문하면, 친절한 미소와 맛있고 시원한 커피 하나는 확실히 받을 수 있다. 나는 적어도 그 사실 만큼은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 그 사실 만큼은 배반 당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도 삶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입 안에 꽂아 넣고 한 모금 빨아 당기는 순간, 나는 약간의 쾌감과 함께 삶에 대한 믿음을 회복한다. 나 자신에게 아주 약간의 사치 어린 선물을 하면서, 작은 쾌락이나마 확실하게 보상으로 받으면서, 온통 불확실한 삶을 견뎌내는 것이다.


많은 기성세대들이 왜 그렇게 젊은 세대가 점심마다 비싼 커피를 사 마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 불안한 시대, 청년들이 택한 일종의 생존법이기도 하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 치열한 경쟁, 자소서를 100개씩 써도 면접 한 번 보기 어려운 취업 불안, 평생 내 집을 가질 수 없고 결혼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초조함 같은 것들 속에서 그들 또한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무엇이라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컬러링북에 색칠을 하여 작은 성취감을 얻거나, '식집사(‘식물 키우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가 되어 식물 키우기에 몰두한다. 아니면 기꺼이 '헬창(‘헬스 마니아’를 뜻하는 신조어)'이 되어 자기 몸 만들기에 빠져들거나, SNS 팔로워나 ‘좋아요’ 늘리기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것도 아니면, 아무런 이익도 없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짤방'을 만들어 공감이라도 얻고자 한다.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이 불안한 세상에서, 그들이 삶을 조금이나마 통제한다고 믿기 위해 택하는 방식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혹여라도 청년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아마도 '불안해서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저들이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서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생각일 수 있다. 언뜻 보면 무쓸모하거나 비효율적인 일에 내가 집착하고 있을 때, 너무 섣불리 자신을 탓하지 않을 필요도 있다. 어쩌면 그런 순간, 우리는 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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