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조선 후기 화원 김홍도는 당대 한 무명 시인의 한시에 영감을 받아 나룻배 한 척이 강을 건너는 ‘도강도’를 그렸다. 빼어난 문장력의 정체불명 시인과 교분을 쌓고자 한양의 고관대작들은 수소문 끝에 그가 산다는 양근(현재 양평군)까지 찾아와 기다리는 일도 빈번했다. 사람들이 그를 찾을 때마다 시인은 “(내 집은) 강가에 있는 나무꾼 집일뿐 과객 맞는 여관이 아니라오”라 말했고, 그의 이름을 물을 때마다 “내 성명을 알고 싶다면 광릉에 가서 꽃에게나 물으시게”라 답했다. 작품집에 기록된 그의 이름은 정초부(鄭樵夫), 정 씨 성의 나무꾼이란 뜻으로 그는 양근 지역 명문가인 함양 여씨 집안의 노비였다. 누가 가르친 적도 없는데 정초부는 사대부도 구사하기 쉽지 않은 수준 높은 한시를 짓는 재주가 있었다. 그 재능을 높이 산 여씨 가문의 여춘영은 그를 자제들과 함께 공부시켰고, 날로 문장이 출중해지는 정초부를 하인으로 부리지 않고 벗으로 예우했다. 보수적인 양반 사회에 소개된 노비 시인의 시는 단숨에 화제가 됐고, 김홍도 그림에 화제시로 등장해 명성을 얻은 뒤로는 양반들의 시모임에 초청될 만큼 실력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양반의 소유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노비 신분으로는 짚신 신은 두 다리를 드러낸 채 패랭이를 쓰고 대청 아래에서 시를 써서 바쳐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정초부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여춘영은 직접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그를 면천시켰다. 시인은 자유를 얻었지만, 생계는 오히려 더 곤궁해져 갔다. 그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쌀 빚을 갚으라 쳐들어온 아전들 등쌀에도 삶의 애환을 서정적 필치로 시에 담아내고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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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생은 혐오스러운 인생의 줄임말로 취업난, 불안정한 환경 등 고단한 현실에 좌절하며 스스로의 삶을 자학의 감정으로 표현한 단어다. 하늘이 내린 재주를 가졌음에도 신분의 멍에에 궁핍한 삶을 연명하다 떠난 정초부를 두고 여춘영은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낙엽이 빈 물가에 쏟아지네.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게”라는 추모시로 그의 불운했던 혐생을 따스히 위로했다.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청춘 앞에 닥친 입시, 경쟁, 취업난, 경기침체는 제도보다 더 공고한 벽으로 다가오는 요즘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20대는 9만3455명으로 전년 상반기 7만2829명보다 28.3%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정초부의 재능을 귀히 여기고 그를 위로했던 여춘영의 마음처럼 우울감과 자학적 표현에 숨은 청년층의 심리를 이해하고, 이들을 품을 수 있는 구체적인 사회적 보호장치 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용례
B: 고맙다. 근데 이게 축하받을 일인가 싶기도 하고. 너는 대학원 간다며?
A: 교수님의 도비가 되는 거죠, 뭐. 그래도 선배는 대기업 들어갔으니 이제 고생 끝이잖아요~
B: 야, 15년을 숨만 쉬고 돈을 꼬박 모아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살까말까 한데, 무슨 고생 끝이야. 아... 이 혐생은 진짜 끝이 안 보이는 거 같아.
A: 얼마나 버텨야 안 버티고도 행복한 순간이 올까요. 에이,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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