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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영의 청경우독] 1597년 '최악의 전쟁' 정유재란, 어떻게 볼 것인가

최종수정 2019.04.12 08:25 기사입력 2019.04.1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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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본과 깊은 간극, 정유재란 잔혹했지만…'역동적 조선' 재평가

[임철영의 청경우독] 1597년 '최악의 전쟁' 정유재란, 어떻게 볼 것인가

[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 1597년,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5년 전 벌어진 전면전에 비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다. 대륙 정벌에 대한 자존망대한 야망을 키운 인물이 한반도를 교두보로 삼았던 그때와 달랐다. 그는 그럴 듯한 정치적 명분을 통한 권력의 세습을 원했고, 뜻을 상실한 그의 야욕은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조선을 유린했다. 일본 교토에는 당시 무참히 살해된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묻은 높이 9m에 달하는 '미미즈카(耳塚ㆍ이총)'가 남아있다.


정유재란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5년 만에 벌어졌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일단락된 전면전이 4년 동안 진행된 '명'과 '일본'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조선의 강화협상 실패로 1597년 정유년에 재발됐다. 간바쿠(關白)이자 다이코(太閤)였던 일본 최고의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7년 동안 그렇게 목적을 달리한 두 번의 전면전을 이끌었다. 좌의정이면서 병조판서로 16세기 말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처참했던 전쟁을 통째로 치른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임진년의 화는 참담했다. 수십 일 만에 한양, 개성, 평양을 잃었고 온 국토가 무너져 내릴 정도였으니 임금께서 도읍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나라를 얻었으니 이야말로 하늘의 뜻이요 조종(祖宗) 어짊이 깊은 덕분이었다…(중략)…시경(詩經)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 후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명 '책봉전략', 일본 '재침략', 조선 '무타협'

동상삼몽으로 강화교섭 실패후 다시 전쟁

임진왜란기 7년에 묶여 상대적으로 생소

"재침 막기위한 과정까지 폄하할 수 있나.."


정유재란은 임진왜란보다 더욱 참혹했지만 상대적으로 생소하다. '임진왜란기 7년'에 묶여 설명돼온 탓이다. 국립진주박물관이 펴낸 '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은 2017년 정유재란 발발 7주갑을 맞아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에 발표된 논문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징비록과는 또 다른 이른바 '7년 전쟁'의 과정에서 조선, 명, 일본 내부의 상황은 어땠는지, 강화협상의 이면에 어떤 암투가 있었는지, 왜 재발했는지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필 수 있는 합작품이다.

책은 "정유재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정유재란 직전 조선의 정보수집과 재침 대응책, 정유재란기 도요토미의 정세 판단과 정책, 정유재란 시기 명 조정의 재정 문제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상황을 각국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명량해전 전후 육군과 수군의 상황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한편 울산성 전투, 순천성 전투 등 굵직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투와 관련한 연구를 담았다.


정유재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손자(孫子)가 말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며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더라도 단기전으로 끝내는 것이 좋다. 16세기 후반 전쟁터가 된 한반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장기화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 침략을 당한 조선, 그리고 그 가운데 처음부터 실리를 따져 군사를 움직인 명 등 3국 모두에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부터 4년 동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심유경(沈惟敬)이 강화교섭에 나선 이유도 대치 상황이 길어져 봐야 서로 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강화교섭은 실패했고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명의 책봉전략, 일본 도요토미의 재침략 구상, 조선의 무타협주의 사이의 간극이 빚어낸 결과였다. 명의 만력제는 은(銀) 2000만냥 이상이 들어간 전쟁을 끝내기 위한 명분 찾기에 골몰했고, 도요토미는 국내 정치용으로 쓰기 위한 전쟁 종결 명분을 얻기 위해 정유재란 직전 10개월 동안 명 대신 조선을 교섭상대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명의 군에 의존해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외교 역량을 집중했다.


3국의 동상이몽이 야기해 1598년까지 1년 이상 지속된 정유재란은 결국 도요토미 사후(死後) 일본군의 철군을 묵인한 명의 책략으로 종료됐다. 후유증은 컸다. 명은 오랜 전쟁으로 군사적, 재정적 타격을 입었고 일본의 권력은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넘어갔다. 책의 서문 격인 '정유재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쓴 저자 허남린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이를 두고 정유재란 이후 전근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지형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고 평했다.


선조와 당시 대부분의 신료들은 끝까지 무능했을까. 이에 대한 다른 관점은 김경태 고려대학교 CORE사업단 연구교수의 '정유재란 직전 조선의 정보 수집과 재침 대응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 담긴 문신 황신(1560~1617)의 보고서에는 선조가 임진년 당시의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비변사를 움직이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체 방어책을 시행하는 한편 명에 대한 보고와 군사를 요청하고 일본과 교섭선을 유지하는 움직임을 동시에 진행했다.


실록의 내용을 분석한 저자 김 교수는 "실패했으나 재침을 막기 위한 과정까지 폄하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이 취한 전쟁 직전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수동적 조선의 모습이 아니라 역동적 조선의 모습을 되살린다는 가치가 있다"고 의미를 분석했다.


"전라도 지방을 전부 짓밟은 후 조선에 화평을 요구하라"는 도요토미의 주문은 재란으로 이어졌고 조선 백성의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한ㆍ중ㆍ일 학자들이 사료를 통해 재해석한 주요 해전과 육지전은 정유재란 1년 동안 이어진 조ㆍ명 연합군, 일본군의 일진일퇴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책은 줄곧 '그렇다면 앞으로 정유재란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동아시아 세계대전 또는 동아시아 7년 전쟁으로 불리는 정유재란. 책의 마지막에 담긴 오타 히데하루 교수의 글이 어렴풋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사천왜성(왜란 당시 치열한 격전지)'에는 조선총독부의 '고적', 대한민국의 '사적', 경남도의 '문화재자료'로 지정됐을 때 표식이 나란히 서 있다. … 요컨대 사천왜성은 한일의 다양한 문제를 엿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다시 말해 왜성은 한일관계의 표상이다."


<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 / 허남린ㆍ김경태ㆍ나타노 히토시ㆍ완밍ㆍ천상승ㆍ노영구ㆍ나동욱ㆍ도리쓰 료지ㆍ오타 히데하루 지음 / 국립진주박물관 엮음 / 푸른역사/ 2만원>

<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 / 허남린ㆍ김경태ㆍ나타노 히토시ㆍ완밍ㆍ천상승ㆍ노영구ㆍ나동욱ㆍ도리쓰 료지ㆍ오타 히데하루 지음 / 국립진주박물관 엮음 / 푸른역사/ 2만원>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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