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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무엇이 우리를 폭력적이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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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이 엄격한 단체에 있을 때였다. 위계는 분명하지만 서열에 따라 나름 공평하고 무사하게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차례만 되면 순서가 끊어졌다.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나에게 돌아올 혜택을 받지 못하게 했다. 줄을 세워놓았지만 처음부터 나에게 돌아올 몫은 없었던 것이다.


작년 여름 몹시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날 벌어진 일이다. 잠결에 "할렐루야"라는 외침과 현관문이 열리고 "다다닥" 달아나는 소리를 들었다. 내 귀를 의심했지만 몇 분 후 다시 똑같은 소리를 듣고 나서 현실임을 자각했다. 뉴스에서 듣던 타종교인의 사찰침범 사건이 떠올랐다. 내 전화를 받고 온 신도들이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침입자들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한 달 뒤 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다음날 CCTV를 설치했다. 그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지난달 며칠 간격을 두고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CCTV 화면을 확인한 후 경찰에 신고했다. 타종교인의 소행인가 의심했지만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경찰의 소식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사로부터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형사의 손에 이끌려온 범인들은 모두 일곱 명, 인근에 사는 중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바로 알았다. 방학을 맞아 심심하던 차에 허술해 보이는 우리 절을 보고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했다는 것을. 차를 나눠주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은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학원 외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교회를 다니는 아이도 있었지만 종교적 배경은 없었다. 아이들을 잘 타일러 돌려보냈다. 별일 아닌 일에 CCTV를 달고 경찰을 부르며 요란을 떤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내 반응이 지나친 것이었을까?


외부의 영향에 무비판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의 순진성 속에서 이 시대의 문제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놀란 것 외에 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과수원이 아니라 이웃종교 건물을 침범한 아이들의 행동에 우리시대 기독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을 공동체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자리를 함께 한 남성 신도들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과수원 서리를 하고 이웃집 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나는 정도의 짓궂은 장난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과거에는 폭력적이지 않았던 일이 폭력적으로 느껴진 까닭은 무엇일까? 미지의 침입자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평소 잘 아는 아이들이었다면 내 반응도, 아이들의 행동도 달랐을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에너지를 발산한다. 얼마 전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나온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이들의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부모들처럼, 우리 사회의 에너지는 줄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데 쏠려있다. 아귀다툼을 해서라도 앞자리만 차지하면 된다는 믿음이 생명의 약동하는 에너지를 헛되게 탕진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발산할 곳을 갖지 못한 사람은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하나? 일견 성적은 열심히 노력한 만큼 얻어지고 그래서 공평한 경쟁인 듯 보이지만, 학교를 가고 학원을 다니지만 대학입시, 그 치열한 줄서기에서 처음부터 들러리에 불과한 아이들의 에너지는 말이다.


살아 있는 것의 에너지가 정당하게 분출될 수 없는 곳에서 폭력이 생긴다. 올바르게 발산되지 못한 에너지는 엉뚱하게 낭비된다. 당신 앞에서 문이 닫히고 줄이 끊어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처음부터 몫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부질없는 줄서기를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구미시 거리마다 내걸린 SK 하이닉스 유치를 기원하는 현수막처럼 서글프다.


명법스님 구미 화엄탑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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