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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tage]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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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라가 연출한 非언어극, 배우 열아홉 명이 200여 명 역할
광장의 인간 군상을 침묵 속에 바라보며 자신을 찾는 시간
'베를린 천사의 시'가 베이스, 상상할 수 있으나 분석은 불가능

연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사진=임종진

연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사진=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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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김아라(63)를 만났다. 서강대학교 교정을 마주 보는 조그만 카페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와서 노트북을 펴놓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노트북을 밀어내고 내 구닥다리 노트북이 좁은 탁자에 자리를 차지한 다음 차를 주문하고, 대화가 시작됐다.


내가 물었다. "먼저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으면 합니다. 페터 한트케의 희곡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과 어떻게 만나신 거죠?"

"희곡은 1992년 작품이에요. 한트케는 빔 벤더스 감독과 '베를린 천사의 시(이 영화는 1993년 작품이다)'라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마흔 번이나 고쳐가며 탈고했다고 하는데, 영화가 나왔을 때 뉴욕에서 감상했고, 감동했어요.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인간들의 마음속 모놀로그를 듣는 내용이지요."

흑백의, 지루하고 따분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이 희곡은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매개로, 그러니까 영화가 이 희곡의 베이스가 된 것이죠. 노숙자가 광장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인생을 여행합니다. 작가 역시 직접 (광장을) 지켜보면서 작품을 썼어요. 스토리가 없이 인물들만 존재합니다. 그 수백 인물의 일상을 지켜보는 동안 떠오르는 개인의 상념, 환영, 연상들을 메모하듯 썼을 겁니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비현실적인 공간, 즉 환영처럼 자신을 만나게 되는 심리적 공간이 있음을 작가는 체험한 듯합니다. 원작에는 450여명의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1993년에 이 작품을 만났고……."


연출가 김아라. 사진=임종진

연출가 김아라. 사진=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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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1993년도에 이 작품을 공연한 것으로 나온다.

"혜화동 연극실험실을 열면서 열다섯 명의 연구단원과 작업했어요. 개관 공연이라 작업의 방향성을 제안하는 목적과 나 자신의 1차적 실험 작업을 위한 것이었어요."

얘기가 잠깐 혜화동 1번지 소극장으로 튀었다. 기억에, 모 선배가 룸살롱이나 하면 딱 좋을 공간이라고 자조했던 장소인데, 그곳이 김아라의 제안으로 일곱 명의 연출가가 갹출해 극장이 됐고, 이후 임차인들이 세대교체해가며 연출가들의 산실이 됐음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일본 작가 오타 쇼고의 '정거장 시리즈'를 연출했다. 대사가 없고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일은 관극이라기보다 전시된 그림을 바라보는 것과 닮아서, 인물 간의 갈등을 읽어내기에 골몰했던 기억을 나는 가지고 있다.


내가 말했다. "정거장 시리즈는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요? 말없이 흘러가지만 바라보는 관객들 사이에서 울고 웃는 반응들이 생성됐어요. 그 작품은 침묵이라는 언어를 연기하는 것이지요, 침묵이 또 하나의 언어였어요. '시간'은 비언어인데…. 멀티 장르로, 복합장르 음악극 정도로…. 연극적 미학을 개념화해서 만들고 있어요. 무대미술, 영상, 신체 움직임, 사운드 등이 함께 어우러질 겁니다. (그의 말이 빨라졌다.) 눈을 감은 채 듣고 있으면 두 시간의 연주이고, 무용으로 보면 안무가 될 거예요. 발소리까지도, 숨소리도 사운드 예술이자 음악이 될 거예요. 움직임이 무용이 됩니다. 일상과 비현실이 구분되지만 일상의 몸짓이 춤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미술은 화랑이… 디자인된 오브제들이 배우들과 일치돼 덩어리째 던져지는 형상으로… 심상들이 움직이는, 키네틱 아트처럼…. 살짝 고대 신전의 오브제인 기둥, 배, 가면 등을 보게 될 건데, 키치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져서 그 새로움이 성스러움을 떠나 야유, 냉소적인 시선으로 만들어질 겁니다. 갤러리 시어터라 할 수도 있어요. 신체 움직임, 음악, 사운드, 미술, 오브제 세트가 같은 포션을 가지고 하나의 연극을 이루는 언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비언어라….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당해본 바가 있습니다!"


"재미요? 삼백여 벌의 옷, 삼백여 명의 인간 군상을 열아홉 명의 배우가 연기해요. 좀 줄였으니 이백여 명의 배역을 연기할 거예요. 퇴장하고 갈아입고 등장하는…. 참, 이 작품은 출판이 되었던가요?"

"이번에 김원익 교수가 번역했어요. 공연에 맞춰 출판될 겁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간혹 손으로 턱을 괴며 말하곤 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여성적이었다. 그의 작품을 봤던 사람이라면 이 '놀랍게도'가 이해될 것이다.


"'시간'에서는 종교적인 환영들이 거론되는데 신화적인 측면으로 변형시키려고 합니다. 쉽게 교감할 수 있는 상징적 존재로 변화, 교체했습니다. 성서적, 신화적, 종교적인 인물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아브람이 이삭을 희생으로 삼아 신에 대한 신앙을 증명해 보이는, 이것을 아가멤논으로 교체, 인간의 이야기로 바꾸고자 합니다…. 일상에서 풍경을 바라보며 무의식적 상황으로 들어가는 게 환영입니다.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의 공간인데, 우리는 종종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죠. 그런데 '시간'에는 무의미한 것들이 널려 있어서 분석하고자 하면 허망해집니다. 현실적 움직임을 보면서 상상할 여지를 찾을 수는 있으나 분석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작가의 무의식이기 때문이죠. 작가도 설명할 수 없는 기억입니다. 분석적인, 사실적인 시각으로는 덩어리가 던져주는 뉘앙스를 잡아낼 수 없습니다."


그는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출가가 아니다. 논리적인 연출가? 나는 한 번도 그런 연출을 만나본 일이 없다. 그의 배우들은 어떨지?


"정동환 선생님과는 신화 스터디를 같이 했어요. 정말 공부 열심히 하는, 지적인 배우예요. 옛날 언니 동생 하던 정혜승 선배를 20년 만에 만났고요. 정동환 선생님, 권성덕 선생님은 1991년부터 콤비처럼 작업해왔습니다. 토론의 과정이나 서로 간 작업 방식이 익숙해졌습니다. 오히려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에겐 당혹스러운 것들이 있을 겁니다. 논리적인 배우? 이성적 논리를 넘어서 감성과 영감을 일깨우는 것이 내 훈련의 방법입니다. 광장이라는 임의의 공간인데, 어리너 스테이지일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서강대 메리홀은… 양면 객석으로 만들 겁니다. 원래 객석을 절반으로 줄이고 마주 보는 객석을 늘렸죠."


정리하면, 막장 드라마의 자극을 찾아 TV 리모컨을 만지고 있는 나의 코앞에, 그는 '시간'이라는 약 숟가락을 불쑥 내밀겠다는 것이다. 삼백여 군상 속에서 너 자신을 찾아보라고….


"실험극장 60주년 기념으로 피터 셰퍼의 '고르곤의 선물' '오레스테스' 삼 부작 등이 기다리고 있어요. '시간'은 실험적으로 준비해보는 공연이고, 무엇보다 실험 그 자체입니다."


그는 오후 연습을 위해 일어섰다. 나는, 배웅했다.


이상구 배우ㆍ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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