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998년)때 전국에 12목을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주목입니다. 이 나주목을 다스리던 수령(守令)이 나주목사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와 군수의 중간쯤 벼슬이겠습니다. 조선시대에도 600여 년간 호남지역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전라도 명칭이 '전주'와 '나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유래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나주목이 생긴 이래 1000년. 그 오랜 세월 동안 390여 명의 목사가 내려왔습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두 번 부임한 이가 있습니다. 조선 광해군 때 사람인 독송 유석증(1570년~1623년)이 주인공입니다. 나주목사에서 물러나 암행어사로 일했던 그는 9년 만에 다시 나주목사로 부임을 합니다. 이유는 나주 백성들의 로비 때문입니다. 첫 부임 때 그의 선정을 잊지 못한 백성들은 상소를 올려 '다시 보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백성들은 십시일반으로 거둔 쌀 300석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유석증이 재부임(1619년)하자 이번에는 유임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유 목사를 계속 있게 해 달라"며 상소와 모은 쌀 2000석을 바쳤습니다. 임기 동안 매년 유임운동이 벌어졌을 정도로 그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당시를 기록한 광해군 일기를 봅니다. "수령을 제수하는데, 모두 뇌물을 받았기에 서로 박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유석증은 청백하고 근신하여 잘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러한 청을 한 것인데, 백성의 마음 또한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학봉 김성일(1538년~1593년)입니다. 그는 나주목사에 부임하자마자 민정(民情)이 막힐까 두려워 정자에 북을 내걸고 백성들과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김성일은 재임기간동안 송사(訟事)를 잘 해결해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해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나주목사 유석증과 김성일의 다스림이 어떠했기에 이렇듯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자세한 선정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을 향한 백성의 사랑만큼은 400여년의 시간을 넘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어찌 이런 벼슬아치가 있었을까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존경스럽고 감동이였습니다. 이내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 같은 작금의 나라꼴에는 한 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조용준 사진부장ㆍ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