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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죽이는 스크린들의 흥행놀음

[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음악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이 개봉한 것은 지난 10월 11일이다. 회사원 김서정(28)씨가 가장 기다렸던 영화였다.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제천영화제에서도 개막작으로 선정됐던 영화다. 음악을 좋아하는 김씨가 올해 개봉작 중 가장 고대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아직도 영화를 보지 못했다. "도무지 볼 수가 없다." '서칭 포 슈가맨'이 상영되는 서울 지역 스크린 수는 단 16개. 4개 개봉관 모두 일반 상영관이 아닌 예술영화 전용관이다. 대부분 강북 지역에 있어 김씨의 직장이 위치한 목동과는 한참 멀다. 그나마 하루에 1차례씩 교차상영으로 진행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오늘은 꼭 보러 가려고 찾아 보면 상영 시간이 오후 2시, 3시일 때가 태반이다. 연차를 쓰지 않으면 영화 보기도 힘들다." 한국 독립영화의 상황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15일 개봉한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영화 '백야'의 경우 서울지역 스크린이 9개에 불과하다. 어지간한 '용단'이 아니면 볼 수 없다.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 '신의 소녀들'이 확보한 스크린 수는 16개다.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 '신의 소녀들'이 확보한 스크린 수는 16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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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극장들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지난 20일 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영화 총 관객 수가 1억명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2006년 세웠던 한국영화 최대 관객 수 기록인 9790만명을 뛰어넘은 기록이다. 여기에 더해 올해 외국영화 관객 수는 7050만명 규모다. '1000만 영화'도 2편이나 탄생했다. 7월 개봉한 '도둑들'은 1300만여명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최고 기록을 세웠고, 9월 개봉한 '광해, 왕의 남자'도 관객 1000만명 고지를 밟았다.

그러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도둑들'은 개봉 첫 주 전국적으로 1312개의 스크린을 점유했다. 전국 스크린의 29.9%에 달하는 수치다. '광해'는 21.1%인 1012개의 스크린을 가져갔다. 한 독립영화 제작자는 "이 정도면 강제로 보라는 얘기"라며 한숨을 쉬었다. 대기업이 영화산업을 틀어쥐고 있는 현실은 양극화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다. CJ그룹 계열인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는 2011년 기준으로 전체 극장의 77.4%, 전체 스크린의 86.7%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 1974개 스크린 가운데 1712개가 이들 '영화재벌' 소유다. CJ 계열사인 CJ E&M과 롯데쇼핑의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영화가 쉽게 전국 스크린을 장악할 수 있는 배경이다. '작은 영화'들은 '큰 영화'의 눈치를 보며 개봉일을 고심한다. CJ E&M이 제작한 영화 '광해'가 개봉일을 예상보다 일주일 앞당기자 추석 대작을 피해 애써 날짜를 잡았던 중소 규모의 영화들은 '멘탈붕괴'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소규모 예술영화나 독립영화가 개봉할 수 있는 스크린은 30개 정도다. 문화부가 지정해 운영하는 '예술전용관'들이다. 이 30개의 스크린을 두고 여러 영화들이 경쟁을 벌인다. 여름철 블록버스터 시즌과 연휴 대목이 지나가고 많은 영화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신의 소녀들'은 6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상영관은 16개 정도를 확보했다. "'신의 영화들' 대중성 없는 영화는 일반 상영관에 들어갈 수가 없다." 수입과 배급을 맡은 영화사 찬란 측의 얘기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늘어났지만 그보다 예술영화 수입 편수의 증가폭이 더 빠르다. 관객 반응에 따라 상영관을 점차 늘려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개봉영화가 또 기다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 '원스'나 '워낭소리'의 성공은 기적에 속하는 축이다." DVD 시장이 극히 협소하고 케이블 등 2차 판매도 쉽지 않은 예술영화인 만큼 극장에서 관객 2만명을 동원해야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지만 쉽지 않다.
다수의 국내 독립영화 제작·배급을 해 온 독립영화 배급사 인디스토리 관계자는 "한국 독립영화는 더 어렵다"고 말했다. "극장들이 한국 독립영화보다 유럽이나 해외 작품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독립영화 편수는 늘어나는데 들어가기가 어렵다. 평균적으로 15개에서 20개 정도 스크린을 얻는다." 다른 영화와의 경쟁 역시 피할 수 없다. "한 주에 개봉하는 (예술/독립)영화들이 5편을 넘을 때도 많다. 대규모 개봉(와이드 릴리즈) 영화들은 1000개, 2000개 스크린을 갖고 개봉하지만 우리는 30개 스크린에서 일주일에 5편이 개봉하고, 전 주에 개봉한 영화까지 밀려오면 한 극장의 1개 스크린에서 한 주 동안 7~8개 영화를 상영하기도 한다."

영진위는 지난 7월 소규모 영화에도 1주일의 상영기간과 전일 전회상영을 보장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표준상영계약서를 발표했지만 실효성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지난 8일 개봉한 영화 '터치'의 제작사 민병훈필름은 최근 CGV, 프리머스,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4곳을 영화진흥위원회에 불공정행위로 신고했다. 최대 97개 스크린에서 개봉했으나 오전이나 심야 시간대에만 제한적으로 상영되는 '교차상영'으로 시장 접근이 단절됐다는 것이다. 개봉 다음주에는 전국 12개 스크린에서 1~2회밖에 상영되지 못했다. 민병훈 감독은 개봉 1주일만에 배급사에 종영을 통보했다.

영진위는 1차 서면조사 후 불공정거래 사실을 인정했다. 21일 조사위원회를 연 뒤 이번주 초 4개 업체에 표준계약서를 준수하라는 내용의 시정공고를 냈다. 그러나 법적 구속력이 있거나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정을 권고하는 선에 그친다. 영진위 영화정책센터 이용선 연구원은 "시정이 안 될 경우 향후 사안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나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해 개선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진위의 역할을 기대하는 영화계와 달리 영진위가 직접적 통제력을 갖기는 힘든 상황이다.

예술영화전용관 수를 늘리는 것도 해답의 일부다. 물론 아직은 더디다. 영진위 문봉환 국내진흥부장은 "내년에는 독립영화전용관 확대에 투자하려고 한다"며 "서울에 3개, 국내에 8개까지 늘리는 것이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간을 직접 리모델링하거나 기존 극장의 일부 상영관을 임대하는 등의 방법을 모색중이다. 그러나 관건은 예산이다. 문 부장은 "현재 예산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는 상황으로 좀 더 기다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진 기자 s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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