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 맥]AI 에이전트 커머스와 디지털 화폐
에이전틱 경제 시대, 한국의 과제와 전략
플랫폼 비교부터 결제까지 한번에
인간에서 기계로 구매 주체 변화
결제 표준화·디지털 화폐 인프라
먼저 장악해야 주도권 쥘 수 있어
"이번 주말 도쿄 여행, 항공권이랑 호텔 예약해줘." 스마트폰에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 인공지능(AI) 에이전트는 수십 개의 항공사 사이트와 숙박 플랫폼을 동시에 비교하고, 최적의 조합을 선택한 뒤 결제까지 완료한다. 사람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이것이 우리가 진입하고 있는 '에이전틱 커머스(Agentic Commerce)'의 세계다. 이 새로운 상거래 패러다임은 단순한 편의성의 진화가 아니다. 구매 주체가 인간에서 기계로 이전되는 근본적인 전환이다. 그리고 이 전환의 중심에는 하나의 핵심 질문이 놓여 있다.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돈을 쓰려면 그 돈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기존의 법정화폐 시스템, 즉 은행 계좌와 신용카드 네트워크는 AI의 속도와 규모를 감당할 수 없다. AI는 초당 수천 건의 마이크로페이먼트를 처리해야 하고, 국경을 초월해 24시간 작동해야 하며, 인간의 승인 없이도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거래를 완결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화폐다.
에이전틱 커머스란 AI 에이전트가 사용자를 대신해 상품을 검색하고, 비교하고, 구매하고, 결제하는 일련의 상거래 행위를 자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단순히 쇼핑 추천 알고리즘이나 챗봇 상담의 연장선이 아니다. AI가 의사결정 주체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른 변화다. 2025년 9월 구글은 AI 에이전트가 플랫폼에서 결제할 수 있는 개방형 프로토콜 'AP2'를 발표했다. 마스터카드, 페이팔,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코인베이스 등 60개 이상의 기업이 협력한 이 표준은 사용자의 구매 의도와 장바구니 내역을 암호 서명으로 봉인해 위변조를 방지하는 방식을 핵심으로 한다.
인간 없이 거래 완결…AI가 주체적 의사결정
같은 시기 오픈AI는 스트라이프와 공동으로 유사한 결제 프로토콜 'ACP'를 개발했고, 쇼피파이와 엣시가 첫 가맹점으로 참여했다. 이더리움 재단도 2026년 로드맵에서 이더리움을 AI를 위한 분산형 글로벌 결제 및 협업 계층으로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표준 전쟁은 이미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진 채 진행 중이다.
세일즈포스는 2025년 연말 쇼핑 시즌 결과를 분석하며, AI 에이전트가 실제 거래를 성사시키는 소매 매출의 의미 있는 부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발표했다. 매킨지는 이미 AI 에이전트 2만5000개를 직원처럼 운용하고 있으며, JP모건은 25만명의 임직원에게 자체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도구를 배포했다. 기업 현장에서 에이전트는 이미 현실이다.
AI 에이전트가 상거래를 수행하려면 결제 수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은 AI 에이전트의 작동 방식과 구조적으로 충돌한다. 기존 은행 시스템은 인간이 승인하는 방식으로 설계돼 있다. 신용카드 한 장을 발급받으려면 본인 인증이 필요하고, 이상거래가 감지되면 사람이 승인해야 한다. AI가 초 단위로 수천 건의 소액 결제를 실행하는 환경에서 이러한 구조는 근본적으로 비효율적이다.
AI와 충돌하는 전통 금융, 이 문제를 해결하는 디지털 화폐
반면 디지털 화폐, 특히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속성을 갖는다. 첫째, '프로그래머블'하다. 스마트 콘트랙트를 통해 조건부 자동 결제가 가능하므로 AI 에이전트가 사전에 설정된 규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거래를 완결할 수 있다. 둘째, 무경계다. 국경을 넘는 결제에서 환전 수수료와 처리 지연이 없어 글로벌하게 작동하는 AI 에이전트에 적합하다. 셋째, 24시간 365일 작동한다. 은행 영업시간이나 국가별 공휴일의 제약이 없다. 넷째, 소액 결제에 최적화돼 있다. 기존 카드 결제망은 소액 거래에서 수수료 비율이 비합리적으로 높지만, 블록체인 기반 결제는 단 몇 센트의 거래도 효율적으로 처리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스테이블코인의 폭발적 성장이다. 2025년 스테이블코인 연간 거래액은 33조달러를 기록하며, 비자와 마스터카드의 합산 거래액을 넘어섰다. 다만 이 수치를 카드망과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스테이블코인의 실제 자리는 카드 결제망이 아니라 그 아래층, 즉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와 자동결제시스템(ACH)이 수십 년간 차지해온 글로벌 정산망이다. 비자가 결제를 라우팅한다면 실제 자금 이동은 여전히 SWIFT와 ACH 위에서 일어나는데, 그 영역이 지금 스테이블코인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의미는 그래서 더 무겁다. 카드망 위 한 겹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의 가장 깊은 정산 인프라가 통째로 교체되는 중이다.
화폐의 형태는 인쇄술 이후 처음으로 매체 자체가 바뀌고 있다. 종이에서 비트로 옮긴 것은 매체 변화가 아니었다. 기존 디지털 결제는 종이 화폐를 스캔한 것에 가까웠다. 스테이블코인이 다른 이유는 화폐가 처음으로 코드 실행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돈이 데이터에서 프로그램으로 진화한다. AI 에이전트가 이 프로그램을 호출한다.
매체 자체의 변화이자 돈의 진화
미국은 에이전틱 커머스 시대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 2025년 7월 발효된 '지니어스법(GENIUS Act)'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 차원 스테이블코인 전용 규제 법안으로, 상원에서 68대 30, 하원에서 308대 122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며 초당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지니어스법의 핵심은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을 민간 통화가 아닌 공공 금융 인프라의 일부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일대일 준비금 보유 의무, 발행사 인가제, 연방과 주(州) 당국의 병행 감독 체계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암호화폐 투기판의 부산물이 아닌 달러 기반 결제 시스템의 공식 구성 요소로 편입시켰다. 이를 통해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미국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 절차에 본격 착수할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흥미롭게도 미국은 '반(反)CBDC법(Anti-CBDC Surveillance State Act)'을 공화당 중심으로 지향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는 개인 금융 정보에 대한 정부 감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민간 주도의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나 유럽의 디지털 유로와 다른 미국만의 전략적 방향이다.
美, 초당적 지지로 에이전틱 커머스 제도 기반 구축
중국은 2014년부터 디지털 위안화(e-CNY) 개발을 시작해 현재 가장 앞선 CBDC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다만 중앙은행이 모든 거래를 감시할 수 있다는 구조적 특성은 AI 에이전트 시대에 오히려 족쇄가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은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정을 본격 집행하며 디지털 자산 시장에 대한 포괄적 규제 틀을 구축했다. 아울러 디지털 유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2026년 중반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가동하며 아시아의 디지털 금융 허브 지위를 강화하고 있다. 홍콩은 2025년 8월부터 법정통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라이선스 체계로 전환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이다. 핀테크(금융+기술) 혁신이라고 하면 미국이나 싱가포르가 먼저 떠오르지만, 은행 컨소시엄 스테이블코인 분야에서는 일본이 앞서 있다. 미쓰비시UFJ, 스미토모 미쓰이, 미즈호 등 일본의 3대 메가뱅크 컨소시엄이 'Progmat' 플랫폼을 통해 공동 파일럿을 2025년 11월 시작했고, 2026년 3월 본격 출시 단계에 진입해 테스트 중이다. 일본 금융청(FSA)이 지급결제서비스법(PSA) 개정을 통해 명확한 법적 프레임워크를 선제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규제의 명확성이 혁신을 앞당긴다는 역설을 일본이 증명하고 있다. 한국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규제 모호성 안에서 모두가 멈춰 있고, 일본은 보수적으로 보이지만 명확한 선 안에서 모두가 달린다.
규제의 명확성 토대로 뛰는 일본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와 활성화된 디지털 결제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국은행은 2026년 3월 'CBDC 및 예금 토큰 활용 프로젝트'인 '프로젝트 한강' 2단계를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1단계 실험에는 8만1000여명이 참여해 총 11만4880건의 실거래를 마쳤고, 2단계는 9개 시중은행이 참여하는 체제로 확대됐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한국은행이 예금 토큰 기반의 AI 에이전트 상거래 실험도 병행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더리움과 아발란체 등 서로 다른 블록체인에서 발행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상점 결제에 사용된 뒤 예금으로 상환되는 흐름도 점검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규제의 공백과 기관 간 갈등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쟁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 사이의 관할권 다툼이 핵심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은행 지분을 51% 이상 요구할 것인가'라는 쟁점에서 드러나듯, 이해관계자들이 협력보다 영역 수호에 집중하고 있다. 두 번째 과제는 글로벌 표준 참여다. 구글의 AP2, 오픈AI의 ACP, 이더리움 재단의 ERC-8004, 코인베이스의 x402 등 에이전틱 커머스를 위한 국제 결제 표준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이 표준 형성 과정에서 수용자에 머물고 있다.
세 번째는 속도의 문제다. 결제 표준은 한 번 굳으면 한 세대 간다. 비자는 1958년 'BankAmericard'로 출발해 지금도 결제망의 정점에 있다. ISO 표준 컨테이너는 1956년에 만들어졌고 그 규격이 그대로 글로벌 무역의 뼈대가 됐다. 에이전틱 커머스의 결제 표준도 같은 운명을 따른다. 지금 정해지면 2050년에도 그 표준 위에서 거래가 일어난다. 한국이 내부 논의와 기관 간 합의에 시간을 보내는 동안, 경쟁국들은 이미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업들을 유치하고 있다. 이번 라운드를 놓치는 것은 한 분기를 놓치는 게 아니라 한 세대를 놓치는 것이다. 샌드박스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용을 조건부로라도 선제적으로 추진하는 실용적 접근이 필요하다.
韓, 규제 공백·기관 갈등 깨고 실용 접근해야
한국은 우선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한 명확한 법제도를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의 관할권 분쟁을 해소하고, 미국의 지니어스법처럼 준비금 요건, 발행 주체, 감독 체계를 명문화한 단일 법안을 제정해야 한다. 규제의 명확성이 혁신의 선행 조건이다. 아울러 국내 AI 기업, 핀테크 기업, 금융기관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원화 기반 에이전트 결제 컨소시엄 구성도 고려해야 한다.
국제 표준화 참여도 강화해야 한다. 현재 글로벌 에이전틱 커머스 표준은 형성 초기 단계에 있다. 이 단계에서 한국 기업과 기관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표준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국제 디지털 금융 협의체 참여를 확대하고, 기업들의 표준화 기구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AI 에이전트 거버넌스 체계를 선제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에이전트 신원 인증, 에이전트별 결제 권한 범위 설정, 이상 거래 탐지 시스템 등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AI 에이전트 금융 거버넌스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다.
AI 에이전트 커머스와 디지털 화폐의 결합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에이전틱 커머스의 시대에 결제 인프라를 장악하는 것은 상거래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의미한다. AI 에이전트가 어떤 화폐로 거래하는지, 그 화폐를 누가 발행하고 관리하는지는 단순한 금융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경제 주권의 문제다. 이 경쟁에서 뒤처지는 국가는 자국 AI 기업들이 달러 기반 USDC나 해외 스테이블코인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AI 에이전트 커머스의 물결은 이미 시작됐다. 그 물결을 타려면 디지털 화폐라는 돛을 지금 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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