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멀고도 어둡다. 졸속이 판치는 세상에서 아직도 우리가 응전해야할 것이 많다는 걸 절감한다."
"소설가 오정희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 역사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쓴 귀밑머리 희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합니다./"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 됩니다./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한다고 합니다./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 봤으면!"('춘천' 전문)"
시인에겐 '강홰년'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며 웃으실 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흐르고 양 볼엔 간혹 홍조를 피우시곤 하였다"(낙타교)는 박완서 누님, "이대로 이대로는 절대 보낼 수 없"었(이대로는)던 이문구 형님, "남루를 걸치고 다니다 음식점 입구에서 내쫓기던"(민병산 선생) 민병산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가면/풍로를 아예 길바닥에 내놓고 입김 호호 불어가며 밥 지어주던" 아내와 "독립문밖 외로운 아파트"에 살았던(독립문 밖)박정만님들이 맡겨놓은 책무가 있다.
이시영은 '시대의 증인'이다. 진술의 대상에는 어릴적 친구들은 물론 수많은 형님, 누나, 동생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언제나 애뜻하고, 눈물겹고, 미안스럽고, 그립고, 아프고, 신산하다. 진술하는 어법은 서사에 서정을 입혀가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시인은 그들의 이야기와 삶을 통해 "세상이 그렇게 빨리 망하진 않을 것"(조춘(早春))이란 걸 발견한다. 이어 스스로 "동구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오래된 팽나무"(정자나무) 아래 "영원한 대지의 자식들"(엣날엔)을 불러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나라' 없는 나라),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을 끊임없이 설파하고 있다.
"시대와의 불화가 정신과 문학을 치열하고 충만하게 했다. 결코 불행한 삶은 아니다. 지금은 자유가 신장되고, 경제가 풍요로와졌다. 그러나 소통 불능이 만연하다. 아직 시인의 책무를 내려놓을 때가 아닌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마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수사적 표현이기는 하나 그 의미는 간단치 않게 들린다. 시인은 "한강철교에서 서강대교에 이르는 마포강변의 산책길, 작은 풀 포기 하나 기억될 만큼 선연하다"는 말로 마포에 대한 유별스런 애정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시영은 말한다.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어찌 시를 쓰고, 세상을 아파할 수 있겠는가 ?"
"양들이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 귀가하고 있습니다./곧, 저녁입니다."('곧' 전문)
한편 이시영은 194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만월', '바람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맺힌 노래', '무늬', '조용한 푸른 하늘', '은빛 호각', '바다 호수', '아르갈의 향기',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등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및 단국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있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