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구룡마을. 올해 1월 이곳을 덮친 화마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마을 입구에는 '토지 우선 매각' '거주사실 인정' 등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펄럭였다.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은 호텔에서의 짧은 임시숙소 생활을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이들을 기다린 건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가 보낸 '명도소송' 소장이었다.
8일 SH에 따르면 구룡마을에는 1107가구 중 178가구가 남아 있다. 여전히 20% 가까운 주민들이 떠나지 못했다. SH는 지난 3월 이들 미이주 세대를 상대로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SH 관계자는 "명도소송은 재개발 진행 시 일반적인 보상 절차에 따른 것"이라며 "6월 중순까지 자진 이주 기간을 두고 있고, 이주하지 않은 세대에 대해서는 강제집행이 진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대표적 판자촌… 보상대책 갈등 재개발 번번이 무산
구룡마을은 1980년대 후반부터 형성된 무허가 주택 밀집 지역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판자촌으로 꼽힌다. 서울시는 2011년 정비계획을 거쳐 2012년 이곳을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하고 재개발을 추진했지만, 보상 대책을 둘러싸고 지방자치단체와 주민, 토지주가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 최근 SH 주도로 3739세대 규모의 주거단지 조성 계획이 확정되면서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기존 거주민 재정착을 위한 통합공공임대주택 1107가구, 분양 941가구, 신혼부부 장기전세주택 1691가구가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시는 내년 착공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이다.
SH는 2017년부터 구룡마을 거주민을 대상으로 임시이주를 지원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달갑지 않다. 준공 시점이 되면 임대료 차등 선정을 위해 소득·재산 기준을 심사해 최종 입주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데, 향후 보증금·임대료 등이 소득 수준과 주변 아파트 시세에 따라 정해지면 금액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란 입장이다. 이강일 구룡토지주민협의회장은 "임시이주 지원을 받고 나가더라도 준공 이후가 문제"라며 "준공 시점에 입주 자격을 심사하면 시세와 소득 구간에 따라 임대보증금과 임대료가 턱없이 높아져 결국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월 화재에 임시숙소생활 마치고 왔는데 '명도소송' 소장
구룡마을 주민 상당수는 60대 이상 노인이다. 은퇴 이후 폐지 수집 등 단순 노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마을에서 만난 양모씨(68)는 "꽁초도 줍고 목욕탕 청소도 하지만, 어디 써주는 데도 없어 시니어 일자리를 찾아봤자 30만원 받는 게 전부"라며 "이 돈으로는 임대주택에 들어간다 해도 높은 임대료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화재로 거처가 사라진 주민들의 현실은 더 가혹하다. 집터 옆 천막에서 식사 당번을 정하고 규칙을 만들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40년 가까이 구룡마을에서 살아온 최모씨(68)는 "딸이 걱정할까봐 천막에서 산다고 말도 못 한다"며 "재산이 다 타버렸는데 이제 와 빈손으로 나가라니, 분양권이라도 받지 않으면 임대료 낼 돈도 없는 사람은 쫓겨나는 것과 다름없다"고 토로했다. 조모씨(78)는 "아들 장가보내려고 준비한 예물까지 다 재가 됐다"며 "당장은 괜찮아도 여름이 되면 비가 오고 날씨가 더워서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일부 주민들은 분양전환 임대주택을 요구하고 있지만,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다. 상당수가 토지 소유권이 없는 무허가 주택 거주자인 탓이다. 토지보상법상 분양주택 공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SH 측도 이런 점을 들어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지역주택조합 설립은 도시개발법에 따라 토지이용계획 수립이 완료돼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분양주택 공급 대상서도 제외… 전문가 "정치적 보완 필요"
40년 넘게 이어진 주거권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책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황수 건국대 부동산학과 겸임교수는 "준공 이후 주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임대료를 조정하거나,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타지역 임대주택으로 이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다만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SH와 지자체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어버이날을 맞아 구룡마을에선 작은 경로잔치가 열린다. 김형곤 더불어민주당 강남구청장 후보, 김현기 국민의힘 강남구청장 후보 등이 마을을 찾아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다. 조모씨(78)는 "정치인들 찾아오는 것도 선거 때나 잠깐이지, 바뀌는 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