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글로벌 경기 불황의 전운을 감지한 국내 대기업들이 '곳간' 채우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 경제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계 제로'에 빠진 상황에서 각 기업마다 내년도 사업 계획 수립과 더불어 유보 자금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선 모습이다.내년 비상 경영 태세 속에서 '공격적 투자'와 '보수적 현상 유지' 등 경영의 큰 틀을 결정하기에 앞서 실탄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뚜렷하다. 조 단위를 넘나드는 대규모 유상증자와 연이은 회사채 발행, 유휴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한 대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연말이 되면서 눈덩이처럼 부풀고 있다.
2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의 3ㆍ4분기 실적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것으로 나타난 가운데 현금성 자산 및 유보금은 예년 대비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실적은 악화일로를 걷는 반면 불황에 대한 기업의 적응력을 가늠할 대표적 지표 중 하나로 꼽히는 현금 및 현금성 자산과 사내 유보금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재벌닷컴이 국제회계기준(IFRS)에 따른 10대 그룹 소속 82개 계열사의 반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유보금 총액은 역대 최대치인 350조원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 283조3000억원 대비 64조7000억원이 6개월 사이 증가한 것이다. 같은 기간 평균 유보율(자본금 대비 유보금 비율)은 1012.5%에서 1128%로 115.5%포인트 확대됐다. 10대 그룹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6월 말 현재 25조3121억원으로 집계됐다. 회사채 발행을 통한 현금 확보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한국예탁결제원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월 회사채 전체 발행 규모는 12조8897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월의 11조2193억원 대비 14.9% 증가한 것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서는 26.3% 늘어난 규모다. 회사채 순발행은 4조3263억원으로 지난 9월(5721억원) 대비 3조7542억원 급증했다.
예탁원 관계자는 "현금이 부족해진 기업들이 유동성 확보를 위해 회사채 발행을 서두르는 추세"라며 "신규 투자를 위한 회사채 발행을 자제해 왔으나 올 하반기 들어 내부 현금 흐름이 악화된 데다 내년 초 예상되는 대규모 차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분석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신창목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재정 위기의 후유증이 본격화함에 따라 기업은 위기 경영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경제 여건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확보해 위기 재발에 대비하는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라며 "외부 변수에 따라 적시에 사업의 진퇴가 가능하도록 재무 유연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혜원 기자 kim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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