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 키위나무, 2025, Oil on linen, 116.8x181cm. 호리아트스페이스
조현정의 첫 개인전 '담장 너머의 숨'은 담장이라는 낮고 익숙한 구조물 앞에서 시작된다. 담장은 안과 밖을 가르지만, 동시에 시선을 건너가게 만드는 장치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일상의 풍경 속에서 포착해온 경계, 거리, 관계의 감각을 회화로 풀어낸다.
화면에는 키위나무, 담쟁이, 낡은 벽, 구름 낀 하늘, 담장 위의 고양이와 새들이 등장한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조현정은 그 고요한 장면 안에 오래 머문 시간의 층을 심어놓는다. '키위나무'에서는 담장을 넘어 무성하게 자란 잎과 하늘을 가르는 새들이 화면을 채우고, 숨어 있는 고양이는 풍경의 일부이면서도 끝내 완전히 섞이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조현정, 담장 너머의 숨, 2026, Oil on linen, 90.0x121.2cm. 호리아트스페이스
이 전시의 힘은 과장보다 응시에 있다. 작가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옮기면서도, 색과 구도를 통해 기억 속 장면처럼 다시 조율한다. 그래서 담장 너머의 숨은 단순한 자연의 기척이라기보다, 보이지만 닿을 수 없고 가까이 있지만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세계의 흔적에 가깝다. 조현정의 회화는 그 경계 앞에서 조용히 멈춰 선 시선의 기록이다. 전시는 6월 13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호리아트스페이스.
정직성 개인전 '표석'. 페이지룸8.
페이지룸8에서 진행 중인 정직성의 개인전 '표석'은 돌아온 장소와 떠나간 사람들 사이에 세운 작은 비석 같은 전시다. 작가는 지난해 풍납동으로 거처와 작업실을 옮긴 뒤, 유년기의 기억과 가까운 이들의 부재를 마주했다. 이번 전시는 그 감정이 응어리로 남지 않도록 회화와 입체, 서예의 형식으로 새긴 작업이다.
전시장 한가운데 걸린 푸른 산수는 차갑고 밝다. '봄눈'과 '봄산'은 높고 단단해 보이는 산조차 결국 사라지는 시간 안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양쪽 벽의 '붉은 집' 연작은 작가를 알린 초기 '연립주택'의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검붉은 집은 배경에서 떨어져 나온 덩어리처럼 보이고, 회색 선과 흰 창은 도시의 흔적이자 기억의 상처처럼 남는다.
정직성 개인전 '표석' 설치 전경. 페이지룸8.
바닥에 놓인 시멘트 표석과 테라코타 두상은 이 전시의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끌어낸다. 죽음을 말하지만, 전시는 어둡게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 살았던 장소, 떠나보낸 얼굴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표석'은 정직성 작업의 새 출발점이라기보다, 빠르게 전진해온 회화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땅과 시간을 확인하는 장면에 가깝다. 전시는 6월 6일까지, 서울 종로구 옥인길 페이지룸8.
권순왕, 바람에 꽃잎이 흔들릴때, 2025, oil on canvas, 72.5×60.2cm. 아트큐브2R2
권순왕의 개인전 'A Wave of Pathos'는 자연을 풍경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로 다룬다. 화면에는 나뭇가지, 붉은 열매, 푸른 하늘, 물결 같은 색면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특정 장소의 묘사라기보다 사랑과 관계, 기억이 지나간 자리를 붙드는 장치에 가깝다.
권순왕,산책자 Flneur, 91X116.7cm, 2017. 아트큐브2R2
첫 번째 화면에서 검은 가지와 붉은 열매는 청록빛 배경 위를 가로지르며, 풍경을 산책하듯 떠도는 시선을 만든다. 두 번째 화면에서는 푸른 물결, 검은 형상, 분홍빛 꽃잎 같은 색 덩어리들이 서로 밀고 당긴다. 구체적 대상은 느슨하게 남아 있지만, 화면의 중심은 재현보다 리듬과 감정의 흐름에 놓여 있다.
이 전시의 핵심은 '파토스'라는 제목처럼 감정의 과잉을 직접 말하지 않고, 색과 선의 파동으로 우회해 보여주는 데 있다.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감정이 잠시 머무는 몸이 되고, 화면 곳곳의 번짐과 흔적은 사랑이 남긴 거리, 온기, 긴장을 암시한다. 권순왕의 회화는 풍경을 보는 일이 곧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설득한다. 전시는 6월 24일까지, 서울 강남구 선릉로 아트큐브 2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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