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글로벌 신산업으로 자리매김한 '노화와의 싸움'
②빅파마도 못 푼 노화신약, 한국에 열린 '틈새'
③구글보다 빨랐던 삼성 항노화 연구, 왜 13년 뒤처졌나
④한국판 아이멕 꿈꾸는 K-빅하트
노화 신약 경쟁의 종착지는 결국 '측정'이다. 노화 신약과 바이오마커 경쟁이 글로벌 의제로 떠오른 가운데, 한국이 감염병·암·항노화를 아우르는 분자진단 칩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1130억원이 투입된 국가 바이오칩 연구소의 5년 청사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번 국가급 바이오칩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포스텍 '글로벌 헬스케어 의공학 연구소(K-빅하트)'가 있다. 생체지표(바이오마커) 100여 개를 단일 칩에서 동시에 측정하는 분자진단 플랫폼과, 인체 혈류 환경을 모사한 동적 오가노이드 칩에서 노화를 인위적으로 유도해 마커를 발굴하는 두 갈래 인프라를 5년 안에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침(타액) 한 방울로 노화 진행 단계를 일상에서 추적하는 개인 맞춤형 분자진단 바이오칩이 1차 목표로 제시됐다. 정밀 조기진단과 항노화 진단 분야에서 한국을 글로벌 거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첫 국가급 투자다.
K-빅하트는 반도체 공정을 바이오에 접목한 바이오메디컬 집적회로(BIC)를 기반으로 초정밀 진단·초고석 분석칩, 오가노이드 기반 질병 모델칩, 세포·유전자 치료칩, 분자진단·치료칩, 양자 기반 초정밀 바이오센싱칩 등 5개 축으로 차세대 헬스케어 플랫폼을 구축하는 국가 연구소다. 만성질환칩, 감염병 칩을 개발하지만 항노화 칩은 이 가운데 분자진단 플랫폼의 대표 응용 분야 중 하나다.
바이오나노포토닉스 마이크로플루이딕 칩(미세 유체 칩)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이평세(루크 리) 포스텍 석좌교수(전 미국 UC버클리, ETH, 하버드대 의대 교수)가 키를 잡는다. 이 교수는 미국 대학에서 교수 재직 시절 연구 결과로 창업한 3개의 회사를 머크, 화이자, 써모피셔사이언티픽 등 글로벌 빅파마와 대형 기업에 매각한 이력이 있다. 칩 기반 바이오 산업의 상용화 트랙을 가장 깊게 이해한 연구자로 꼽힌다.
K-빅하트 초대 소장을 맡은 이 교수는 최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노화는 한국과 전 세계가 동시에 직면한 가장 큰 의료 수요이며 이를 칩 기반 분자진단 인프라로 해결하는 것이 K-빅하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항노화 신약 개발 경쟁이 가속화할수록 결국 승부는 노화 단계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오가노이드 기반 질병 모델칩과 초정밀 진단·초고속 분석칩을 통한 진단 인프라에서 갈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요 목표는 노화와 관련된 바이오마커 100여 개를 한 번에 검출하는 통합 분자진단 칩, 즉 샘플 전처리·증폭·검출 과정을 모두 통합한 칩이다. 지금까지 노화 진단은 혈액·소변에서 마커를 하나씩 분석하는 방식이 주류였다. 100개 단위 마커를 단일 칩에서 동시 측정해 개인의 생물학적 나이, 노화 속도, 노인성 질환 위험 등을 단시간에 정밀 진단하는 최첨단 시판 제품은 없다.
이 교수는 "마커 수십 개를 동시에 처리하려면 칩 위의 반응기들이 고직접을 가져야 하고 샘플 전처리부터 검출까지 원스톱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개별 기술은 미약하게나마 존재하지만 초고집적도를 가지며 통합 제조 공정으로 묶어 조기 진단 및 개인 맞춤형 항노화 치료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수 있는 칩-투-월드(Chip-to-world) 인터페이스는 아직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이평세(루크 리) 포스텍 석좌교수가 전남 여수 여수엑스포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국생물공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정연 기자
관건은 칩 양산 인프라다. 100개 마커를 단일 칩에 집적하고, 침 한 방울 분량의 샘플 전처리부터 다중 검출까지 하나의 디바이스에서 처리하려면 반도체 수준의 미세공정 역량이 필요하다. 이 교수는 마이크로플루이딕 반응기 수백 개를 칩 한 장에 새기는 작업을 사실상 반도체 공정의 연장선이라고 비유했다. 그가 K-빅하트의 다음 단계로 세계 최초로 바이오메디컬 IC(BIC)칩 대량생산을 위한 'BIC 파운드리' 통합 제조 거점 구축을 강조하는 이유다.
벨기에 비영리 반도체 연구소 아이멕 모델을 참고해서 시작하지만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최고의 BIC 칩 개발과 생산을 위한 BIC 파운드리를 한국에 설립하는 전략이다. 아이멕은 운영비의 75%를 삼성전자·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공정 위탁 수주로 충당한다. 일본과 스위스도 유사한 모델로 추격 중이다. 일본은 전자 대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줄기세포 리프로그래밍 인프라에 정부와 공동 투자하고 있으며 스위스 로슈와 네덜란드 정부는 줄기세포 생물학과 오가노이드 연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한스 클레버스 박사 등 개인 연구자에게 자원을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소장은 지난 1월 아이멕 방문 당시를 회상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다수의 박사급 연구원들을 포함한 6600명의 인력 인프라를 통해 뇌칩·진단칩·오가노이드칩을 개발하고 있는 것"이라며 "양질의 연구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선 풍부한 인력과 자본이 필수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어 "항노화의 본질은 '우아하고 건강하게 늙는 것'"이라며 "언제 치매가 시작될지 또는 어떤 장기가 먼저 노화하는지 사전에 파악해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생활 습관을 미리 개선하는 것이 K-빅하트가 제시하는 진단 인프라의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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