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냄새를 잃은 권위[슬레이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속 미디어 몰락
편집장 안목보다 클릭 수와 알고리즘이 결정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패션 잡지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리프)는 새내기 비서 앤디(앤 해서웨이)의 보풀 가득한 블루 스웨터를 보며 말한다. "그건 그냥 블루가 아니야. 세룰리안 블루야." 수백만 달러의 수익과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낸 색을 무심히 소비하면서도, 정작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꼬집는 장면이다. 동시에 대중의 취향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게이트키퍼로서 자신의 권위를 선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종이 냄새를 잃은 권위[슬레이트]

냉정한 시선과 단호한 어조의 미란다는 절대 권력 그 자체였다. 그러나 20년 만에 돌아온 속편에서 그의 권위는 더 이상 종이 냄새를 품지 못한다. 디지털 자본 앞에서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는 탐사보도 뉴스룸 직원들이 시상식 도중 문자 메시지로 해고 통보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실직자가 된 앤디는 생계를 위해 런웨이 기획 에디터로 복귀한다. 하지만 미란다가 군림하던 견고한 매체 생태계는 이미 무너진 뒤다. 모기업 소유주의 사망 이후 런웨이의 입지도 흔들리고, 후계자는 패션 잡지의 가치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결국 IT 거물 벤지(저스틴 서로)에게 헐값에 매각하려 한다.


이 매각 위기는 사회적 가치를 걸러내던 문명적 필터의 붕괴를 상징한다. 벤지는 인공지능(AI) 시대 앞에서 인간의 창의성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믿는 기술 자본의 허무주의를 대변한다. 단순한 경영 변화가 아니다. 미디어 생태계 전반의 재편이다. 과거 저널리즘이 가치 있는 의제를 설정하고 대중의 품격을 견인했다면, 오늘날 플랫폼 자본주의는 인간의 편향을 자극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주의력 경제'를 강요한다. 미학적 통찰과 저널리즘적 무결성은 비효율적 관행으로 취급된다.


종이 냄새를 잃은 권위[슬레이트]

위기는 결국 개인의 고뇌로 이어진다. 70대에 접어든 미란다는 더 이상 절대 권력자가 아니다. 사내 인사 규정을 의식해 직접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한때 주변을 얼어붙게 하던 독설도 삼킨다. 편집장의 안목이 산업을 좌우하던 시대는 저물고, 이제는 클릭 수와 트래픽이 표지를 결정한다.

앤디 역시 달라졌다. 1편에서 그는 미란다의 세계를 거부하고 떠났다.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2편에서는 경력 단절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한때 경멸했던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온다. 개인의 무결성과 생존 사이의 딜레마를 온몸으로 감당한다.


영화는 결국 '연대'에서 전환점을 찾는다. 기술 자본의 무자비한 해체 압력 앞에서 비슷한 처지가 된 두 사람은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는 대안적 길을 모색한다. 단순한 굴복이나 저항이 아닌, 제3의 길이다.


종이 냄새를 잃은 권위[슬레이트]

자본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자본의 논리에 전문성을 전부 종속시킬 수도 없다. 영화가 제시하는 해답은 타협과 저항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다. 생존을 위해 자본과 협력하되, 전문성과 윤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편집자로서의 미학적 판단을 지키면서도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식을 찾아가는 일이다. 언론이나 패션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려는 현대인 모두의 실존적 과제에 가깝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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