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연일 국내 금융의 신용등급 시스템을 정면 비판하며 '잔인한 금융' 개혁을 예고했다. '고신용자에 저금리, 저신용자에 고금리'를 적용하는 금융 구조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현행 신용등급 체계의 수술을 주문한 것이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런 접근이 포용금융 확대 취지를 넘어, 시장 원리에 기반한 금리 체계를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김 실장은 최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금융의 구조 시리즈'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글을 연달아 게시하며 현재 신용등급 체계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현재 구조를 두고 "금융이 설계한 보이지 않는 계급장"이라며 "왜 가장 힘겨운 이가 가장 무거운 금리의 짐을 지는가"라고 비판했다. 또 "신용등급은 철저히 과거만 보고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다"며 "낡은 신용평가란 '틀'을 과감히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중은행을 향해서는 "고신용자라는 안전한 온실 속에 갇혀 있다. 특정 구간을 비워두고서는 성장이 어렵도록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은행이 움직일 것"이라고 지적하며 구조적 변화를 촉구했다.
청와대가 직접 신용등급 체계와 금리 양극화를 문제로 지적하고 금융당국과 은행에 해법을 요구하면서, 금융위원회의 후속 대응도 불가피해졌다. 앞서 금융위가 지난달 27일 '중금리 대출 활성화 방안'을 내놨지만, 이번 김 실장의 발언은 해당 정책만으로는 금융 취약계층의 실질적 접근성 개선을 이끌 수 없다는 문제 제기로 읽힌다.
시장에서는 이번 신용등급 체계 개편 주문이 금리 결정의 기본 구조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다. 신용평가는 본질적으로 과거 금융 이력을 기반으로 설계된 시스템으로, 이는 해외 주요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등에서는 기존 평가에 더해 '대안신용평가'를 도입해 통신비, 공과금, 월세 등 비금융 정보를 반영하고 있다. 다만 이는 금융 이력이 부족한 '씬 파일러'를 제도권에 편입시키기 위한 장치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미국의 대안신용평가는 금융 이력이 없는 소비자를 제도권에 편입시키는 데 목적이 있고, 저신용자 대출 확대를 위한 제도는 아니다"라며 "한국 역시 비금융 데이터를 반영한 대안신용평가 도입을 지속 추진해왔고 신용등급 체계를 고도화하려는 움직임은 긍정적이지만, 이를 저신용자 대출 확대나 금리 인하로 연결하는 방식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금리를 일종의 '복지' 수단으로 접근하는 움직임이 시장 원리와 충돌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금리는 차주의 상환 능력과 부도 리스크를 반영한 '가격'으로 위험이 낮을수록 금리가 낮고, 위험이 높을수록 금리가 높아지는 구조가 금융의 기본 원리라는 것이다. 특히 일정 신용구간을 넘어서면 부실률이 급격히 상승해 금리 격차는 구조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게 은행의 설명이다. 금융위에 따르면 전 업권별 신용대출 평균 금리는 지난해 8월 기준 고신용자인 10분위~6분위가 4.9~5%이고, 5분위(중신용자)가 5.4%, 3분위(중신용자)가 10.7%, 1분위(저신용자)가 13.9%까지 뛴다. 이 같은 '금리 단층'을 무작정 해소하려다 중신용자는 은행에서 대출을 아예 받지 못하는 '대출 절벽'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금융권 관계자는 "중저신용자 금리를 낮추려면 은행이 손실을 감수하거나, 고신용자 금리를 올려 비용을 전가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중신용자에 대한 대출 자체를 줄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2금융권으로 밀려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도 은행들은 새희망홀씨, 사잇돌대출 등 중신용자를 위한 서민 정책금융 상품을 공급해 일정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가계대출 총량 규제를 강화해 상환 능력이 높은 대출은 억제하면서, 동시에 중저신용자 대출 확대를 요구하는 정책 기조 간 충돌도 모순으로 지적된다. 현 정부 들어 '갚을 수 있는 만큼 빌린다'는 금융 원칙과 정책 방향 사이의 괴리가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은 중저신용자의 금융 소외를 완화하고 포용금융을 확대하는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시장 원리를 훼손하기보다 정부 보증이나 금융회사의 출연 확대 등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권 관계자는 "경제·금융 관료로 오랜 기간 시장을 경험한 정책 책임자의 발언으로는 시장 원리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 보인다"며 "포용금융 확대 기조와 신용등급, 금리 체계 개편 문제는 분리해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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