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남긴 유언의 효력을 둘러싼 분쟁에서 대법원이 '구수증서(유언자가 말로 남긴 내용을 증인이 받아 적는 유언)에 의한 유언'의 인정 범위를 보다 넓게 보아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단순히 녹음 방식이 가능해 보인다는 사정만으로 구수증서 유언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주심 오경미 대법관)은 예금채권 지급을 둘러싸고 원고와 피고 은행 간 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쟁점은 민법 제1070조 제1항에 따른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의 요건 충족 여부였다. 해당 방식은 질병 등 급박한 사정으로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등 일반적인 방식의 유언이 불가능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망인은 사망 사흘 전 병실에서 산소호흡기 등 의료기기를 착용한 상태로 자신의 전 재산을 원고에게 증여한다는 취지의 유언을 구술했다.
이 과정에는 증인 2명과 수증자가 입회했고, 내용은 필기 및 낭독됐으며 변호사가 전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다만 당시 망인은 호흡이 어려운 상태에서 계좌번호 일부를 겨우 말할 수 있을 정도였고, 일부 재산 내역은 주변 도움을 받아 기억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1·2심은 이 유언의 효력을 부정했다. 망인이 재산 상태와 유증의 의미를 인지하고 발화할 수 있었던 만큼 녹음 방식의 유언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므로, 구수증서 유언의 보충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또한 녹음 유언으로서의 형식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망인이 일부 계좌번호를 기억해 발화할 수 있었다는 사정은 의사능력의 존재를 보여줄 뿐, 곧바로 녹음 방식의 유언이 가능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아니라고 봤다. 특히 당시 신체 상태를 고려할 때, 유언의 전체 내용을 일관되게 육성으로 녹음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가능했는지 여부를 별도로 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질병 등으로 인해 다른 방식의 유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종합적 심리가 필요하다"며 "원심은 일부 사정만으로 구수증서 유언의 요건을 부정해 법리를 오해했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은 구수증서 유언의 '보충성' 판단 기준을 엄격한 형식 논리에서 벗어나, 당시의 신체 상태와 실제 가능성을 중심으로 재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향후 하급심에서는 망인의 당시 건강 상태, 발화 능력의 지속성, 녹음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다시 심리해 유언의 효력을 판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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