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본회의 안건 100건, 밀린 숙제 처리하듯…

[기자수첩] 본회의 안건 100건, 밀린 숙제 처리하듯…

"나 빨리 끝낼 건데…."


지난 23일 국회 본회의.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를 대표해 10건의 법안 제안설명에 나선 문금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리를 뜨는 의원들을 바라보며 이같이 말했다. 의원들은 법안 내용이 소개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을 예상한 듯 전화 등 개인 용무를 챙기려는 모습이었다. 문 의원은 '짧을 것'이라며 표결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발걸음을 돌려세우려 했다.

실제 문 의원의 제안설명은 놀랄 만큼 간결했다. 10건의 법안명을 나열한 뒤 "자세한 내역은 단말기 회의 내용을 참고해달라"고 말했다. 제안설명에 1분30초 정도 할애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다른 의원들의 법안 제안 설명 때도 마찬가지다.


법안 심사와 관련해 '빨리 해치우자'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진짜 마지막이다"는 발언들도 이어졌다. 가령 염태영 민주당 의원은 국토교통위원회 제안설명에서 전세사기특별법 관련 내용과 의미를 상세히 소개했다. 그러나 나머지 6건의 법안은 발의 의원 이름만 호명한 뒤 "전광판에 표시돼 있다"며 넘어갔다.


국회법 93조는 본회의에서 안건을 심의할 때 위원장의 심사보고를 듣도록 규정했다. 상임위 중심주의를 채택한 국회에서 본회의 표결 절차를 앞두고, 다른 상임위 의원들에게 법안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이다. 100여건 이상의 안건, 그것도 비쟁점 사안일 경우 별도의 공부시간을 두지 않는 이상, 처리 법안 내용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 때문에 심사보고 관련 질의, 토론 절차를 마련했다.

농해수위 법안 처리 과정에서 토론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은 '임도의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안' 처리와 관련해 대형 산불 대응 측면에서 임도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국회 산불피해지원특별위원회 소속인 차 의원은 임도를 둘러싼 전문가 논쟁을 소개하며 "진지하게 공론화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정법까지 만들어서 임도를 추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라며 의구심을 드러냈다. 법안명만 나열하는 식의 제안설명으로 끝났다면 알 수 없었던 내용이다.


입법은 사회의 규율과 근간을 세우는 일이다. 다양한 이해관계나 가치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 가운데 기준을 정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본회의 처리 과정은 요식 행위처럼 취급될 때가 많다. 상임위 차원에서 충분히 논의됐을 것이란 전제로 본회의 표결은 밀도 있는 논의를 생략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인식된다. 의원들은 마치 수업 마치기를 기다리는 학생들처럼 임한다. 그렇게 입법이 이뤄진다면 300명의 선량을 뽑아놓은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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