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대출 1910조원. 대한민국 경제의 현주소라기엔 너무나 비대하고 위태로운 숫자다. 정부가 올해 가계대출 총량 관리 목표치를 지난해(1.7%)보다 낮은 1.5% 이내로 설정하며 초강력 '대출 조이기'에 나선 것은 단순한 수치 관리를 넘어 생존을 위한 고육책이다. 특히 경제성장률보다 낮은 수준으로 부채를 관리하겠다는 가이드라인은 부채의 질주를 멈추지 않고서는 경제 체질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금융당국의 절박한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현장의 비명은 거세다. 1금융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차주들이 제2금융권이나 고금리 자동차 할부 금융으로 몰리는 이른바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은 서민들을 더 가혹한 고금리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 아니냐는 우려로 이어지며 타당한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최근 기자가 만난 당국 고위 관계자들 역시 이러한 부작용과 현장의 아우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은 한결같이 단호했다. "풍선효과로 인한 진통은 안타깝지만, 가계대출이라는 거대한 댐이 무너졌을 때 닥칠 '국가적 재난'에 비하면 기꺼이 감내해야 할 비용"이라는 것이다.
당국이 이토록 냉정하리만큼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은행이 거듭 경고해 온 가계부채의 구조적 독성이 이미 경제의 혈관을 막는 '동맥경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계 소득의 상당 부분이 생산적인 소비가 아닌 원리금 상환에 묶이면서 내수 시장은 동력을 잃었다. 국민이 지갑을 닫으면 골목상권과 자영업자가 쓰러지고 이는 다시 가계 소득 감소로 이어지는 질식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빚이 빚을 낳고 소득이 빚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제가 활력을 찾기란 요원하다.
더 심각한 것은 혁신 산업으로 흘러가야 할 생산적 자금의 실종이다. AI 반도체, 미래 모빌리티, 신재생 에너지 같은 국가 미래를 결정지을 핵심 산업으로 가야 할 자본이 오직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속에 갇혀 있다. 돈이 도는 곳이 오직 부동산뿐인 나라에서 미래 성장의 씨앗을 뿌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로 한국은행 연구에 따르면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임계점인 80%를 넘어서면 부채 증가가 오히려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데, 이미 100%를 상회한 우리나라는 사실상 미래의 성장 동력을 통째로 저당 잡히고 있는 셈이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가계부채 점검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6.4.1 조용준 기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려하는 풍선효과는 대출 규제의 필연적인 '현상'이지만, 규제를 멈춰야 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가 경제가 얼마나 부동산 대출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방증한다. 자동차 대출이라는 우회로를 찾아서라도 부동산 자금을 마련하려는 비정상적인 열망을 이번에 확실히 꺾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부동산 공화국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당국 고위 관계자가 "욕을 먹더라도 지금 공기를 빼지 않으면 나중엔 터지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의 강력한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은 나중에 닥칠 '국가적 심근경색'을 막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다. 총량 규제 고통은 개혁의 시작일 뿐이다. '부동산 불패'라는 망국적 신화가 깨지지 않는 한, 가계부채는 언제든 우리 경제의 엔진을 멈춰 세울 '결정적 암초'로 돌변할 수 있다. 1910조원이라는 숫자가 던지는 경고는 우리 경제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파국을 막기 위해 현재 수반되는 진통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당국의 단호한 결단이 '국가 생존을 위한 필수적 선택'으로 읽히는 이유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