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을 깨우는 '바이러스 DNA 바코드' 찾았다"…헤르페스 감염 반응의 비밀 규명[과학을읽다]

UNIST, 반복 서열 poly(T)가 면역센서 AIM2 활성화…감염 억제·치료 전략 새 단서
국제학술지 Nature Communications 게재

몸속에서 바이러스를 감지하는 '면역 스위치'의 작동 원리가 DNA 수준에서 규명됐다. 바이러스 유전체 안에 숨겨진 특정 반복 서열이 면역 반응을 켜는 '바코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되면서 향후 감염병 치료 전략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단서로 주목된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은 이상준 생명과학과 교수 연구팀이 헤르페스 바이러스 DNA에 존재하는 'poly(T)' 반복 서열이 선천면역 센서인 AIM2를 활성화해 염증 반응과 감염 세포 사멸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연구는 성균관대·제주대·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와의 공동연구로 수행됐으며,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지난 13일 게재됐다.

숙주의 면역센서가 바이러스 DNA를 인식하는 원리. 숙주 세포 내 선천 면역 센서 AIM2는 헤르페스 1형 바이러스 HF 종에 특이적으로 존재하는 티민 반복 서열을 인식함으로써, 염증성 사이토카인 활성화와 세포 사멸을 유도하는 면역반응을 개시한다. 연구팀 제공

숙주의 면역센서가 바이러스 DNA를 인식하는 원리. 숙주 세포 내 선천 면역 센서 AIM2는 헤르페스 1형 바이러스 HF 종에 특이적으로 존재하는 티민 반복 서열을 인식함으로써, 염증성 사이토카인 활성화와 세포 사멸을 유도하는 면역반응을 개시한다. 연구팀 제공


헤르페스 1형 바이러스는 전 세계 인구의 약 67%가 감염돼 있을 정도로 흔한 DNA 바이러스다. 평소에는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면역이 약해지면 재활성화돼 입술 주변 염증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숙주 세포의 선천면역 시스템이 작동하는데, 그 핵심 역할을 하는 단백질이 바로 AIM2다.

연구팀에 따르면 AIM2는 바이러스 DNA 가운데 티민(T) 염기가 반복된 구간(poly(T))을 인식해 감염 여부를 판단한다. 특히 동일한 헤르페스 바이러스라도 이 반복 서열의 유무에 따라 면역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poly(T) 서열이 있는 균주에서는 강한 염증 반응과 세포 사멸이 유도된 반면, 해당 서열이 없거나 길이가 짧은 경우에는 면역 반응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반복 서열 길수록 면역 반응↑…"생존율까지 좌우"


연구팀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이 서열의 기능을 직접 검증했다. poly(T) 구간을 제거하자 면역 반응이 사라졌고, 반대로 없는 균주에 삽입하자 새로운 면역 반응이 유도됐다. 특히 반복 서열이 길수록 반응이 강해지는 '길이 의존성'도 확인됐다.


동물 실험에서도 차이는 뚜렷했다. poly(T) 서열을 가진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우 면역 반응이 활성화되며 바이러스 증식이 억제됐지만, 해당 서열이 제거된 경우에는 면역 반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아 치명적인 감염으로 이어졌다. 바이러스 유전체의 미세한 차이가 숙주의 생존까지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연구팀 사진. 좌측부터 이상준 교수, 오수현 연구원, 오주은 연구원, 이지혜 연구원. UNIST 제공

연구팀 사진. 좌측부터 이상준 교수, 오수현 연구원, 오주은 연구원, 이지혜 연구원. UNIST 제공


연구팀은 또 이 반복 서열이 헤르페스뿐 아니라 엠폭스바이러스, 아데노바이러스, 코로나바이러스 등 다양한 바이러스에서도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상준 교수는 "인체 면역 센서가 생각보다 훨씬 정교하게 바이러스를 인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바이러스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면역 센서의 활성도를 조절하는 새로운 치료 전략 개발의 이론적 토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반복 서열은 다양한 감염병 바이러스에서 보존돼 있는 만큼, 질병 중증도와 유전체 서열 간의 관계를 규명하면 보다 정밀한 치료 전략 설계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는 바이러스 단백질 중심이었던 기존 면역 연구에서 나아가 유전체 자체가 면역 반응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문가들은 향후 신종·재출현 감염병 대응을 위한 '면역 조절형 치료제'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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