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누룩' 스틸 컷.
수치로 환산하고 효율로 재단하는 시대. 삶과 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무형의 가치를 믿는 행위가 종종 무지한 광기나 아집으로 치부된다.
배우 장동윤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누룩'은 이 씁쓸한 현실을 양조장으로 끌고 들어온다. 누룩이 사라졌다며 시름시름 앓는 소녀 다슬(김승윤)을 통해 현대인이 상실한 근원적 신뢰와 신앙의 실체를 추적한다. 진리를 갈구하는 개인과 이를 억압하는 다수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구도에 한국 전통주라는 토착적 소재를 결합했다.
다슬은 학교에 몰래 가져갈 정도로 막걸리에 집착한다. 전통 누룩을 집안의 가보처럼 여긴다. 오빠 다현(송지혁)은 그런 그녀가 못마땅하다. 걱정하는 마음은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된다. 양조장에서 누룩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낸다. 보이지 않는 신념을 물리적 힘으로 거세한다. 변해버린 막걸리 맛에 다슬은 누룩이 사라졌음을 단번에 알아챈다. 그는 갈증을 온몸으로 앓아낸다. 종교적 수난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다.
영화 '누룩' 스틸 컷.
다슬이 지키려 한 것은 단순한 발효제가 아니다. 장동윤 감독은 전통 방식으로 빚은 막걸리와 일반 막걸리를 '살아 숨 쉬는 것'과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것'의 차이로 구분한다. 일반 막걸리가 이윤 창출을 위해 규격화된 공산품이라면, 다슬이네 막걸리는 인간의 정성과 켜켜이 쌓인 시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마음이 응축된 문화적 유산이다. 그 차이는 기능적 우열이 아니라 존재론적 정체성에 있다.
비단 막걸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효율과 생산성을 앞세워 무형의 가치를 배제하는 일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벌어진다. 예컨대 장인의 손길이 깃든 전통 기술은 공장 자동화 시스템에 밀려 사라진다. 오랜 시간 축적된 지역 문화도 관광 상품으로 소비되다 희석된다. 숫자로 증명할 수 없는 가치이기에 비효율로 치부돼 폐기 대상이 된다.
일상의 풍경이 증거다. 동네 서점은 온라인 할인 배송 앞에서 비효율적 공간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골목길 빵집도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의 표준화된 맛에 밀려났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익힌 기술보다 당장 생산량이 중요하고, 세대를 거쳐 전승된 지혜보다 검증 가능한 데이터가 우선시돼 벌어진 현상이다. 그렇게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복원 불가능한 것들을 지워내고 있다.
영화 '누룩' 스틸 컷.
동네 서점이 사라지면 단순히 책을 살 공간 하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직접 골라 진열한 책들, 손님의 취향을 기억하는 대화, 우연히 발견하는 책과의 만남이 함께 지워진다. 골목길 빵집이 문을 닫으면 어떨까.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구워지던 빵 냄새, 단골손님을 알아보는 인사, 계절마다 조금씩 달라지던 맛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지만, 우리 삶을 지탱하던 보이지 않는 관계와 기억의 그물망이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누룩이라는 소재로 포착했다. 다슬이 지키려 한 누룩은 측정할 수 없지만 삶을 지탱하는 모든 것의 은유다. 동네 서점, 골목길 빵집,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숨어 있는 '누룩'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지고 있지만, 하나같이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었던 것들이다. 당신의 누룩은 아직 살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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