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은 혁신 기업 투자에 따른 면책 적용 범위와 인정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을 한목소리로 지적하며, 보다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가이드라인 마련을 촉구했다. 생산적 금융 활성화를 위해서는 면책 제도 개선과 더불어 자본 규제 완화, 정책 금융과의 리스크 분담 구조 구축, 지분 투자 활성화, 세제 인센티브 등 다각적인 제도적 보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제언이다.
아시아경제가 28일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시중은행 5곳 모두 면책 적용 기준과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공통적인 애로사항으로 꼽았다.
A 시중은행 관계자는 "면책 제도가 명문화되어 있더라도 실제 현장에서는 어느 선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지 기준이 모호하다는 인식이 크다"며 "정책 취지와 절차 준수 여부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사후에 손실이 발생하면 결과론적인 책임론이 더 부각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결과에만 집중하는 '사후 책임' 중심의 평가 문화도 기업 금융의 활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조직 내에 결과 중심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보니, 실무자들에게는 면책 규정이 실질적인 보호장치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B 시중은행 관계자는 "부실이 발생하면 실무자의 판단 과정보다는 결과 자체에 집중해 책임을 묻는 문화가 여전하다"며 "이러한 간극이 현장의 소신 있는 지원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C 시중은행 관계자는 "나중에 부실이 발생했을 때 감사나 검사 과정에서 결과론적 시각으로 과실 여부를 엄격하게 따지는 경향이 있다"며 "실무자 입장에서는 증명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심리적 위축감이 커 보수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시중은행들은 생산적 금융 확대의 가장 큰 걸림돌로 수익성과 리스크 관리의 충돌을 꼽았다. 기업 금융은 기존 소매 금융보다 위험 가중치가 높은 데다, 자산 건전성 지표에 직접적인 압박을 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위험가중자산(RWA) 관리에 대한 부담을 낮춰줘야 한다는 것이 은행권의 공통된 목소리다. 최근 금융당국이 재발 가능성이 낮은 은행발 대형 사고에 대해 일정 요건 충족 시 자본 부담을 완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실효성이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신용등급이 없거나 낮고, 실물 담보가 부족한 중소·혁신기업에 대한 대출은 높은 위험가중치(RW)가 적용돼 금융권의 적극적인 참여를 어렵게 한다. 현재 기업 대출의 평균 위험 가중치는 43% 수준이나, 표준 신용등급 AA- 이상 기업에는 20%가 적용되는 반면 신용등급이 없는 무등급 기업에는 100%가 부과된다.
D 시중은행 관계자는 "생산적 금융의 핵심인 중소·벤처 기업 대출이나 혁신 산업 투자는 일반 담보 대출보다 RW가 높게 설정된다"며 "주주 환원 정책 강화와 건전성 규제가 엄격해진 상황에서 RWA의 증가는 생산적 금융 확대 의사결정에 큰 부담 요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RWA 산정과 자본 규제는 바젤(Basel) 체계에 기반하고 있어 변경이 쉽지 않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주요국과 비교해 국내 규제가 보수적인 측면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합리적인 수준의 규제 완화를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분 투자 활성화를 위한 보완책 마련도 시급하다는 의견이다. 직접 투자뿐 아니라 펀드 출자, 공동 투자 등 다양한 방식이 활용되도록 제도적 선택지를 넓혀줘야 한다는 것이다.
E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의 직접 자금 공급 외에도 퇴직연금의 벤처 투자 허용과 같은 전향적인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비금융 주식 취득 제한 완화나 벤처 투자 손실 보전 장치 등 투자 불확실성을 상쇄할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 외에도 정책 금융과 민간 금융이 손실 위험을 나누는 협력 구조 강화, 투자 수익에 대한 세제 혜택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마중물이 마련되어야 금융사가 리스크를 감수하고 생산적 분야로 자금을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금융위원회는 은행권의 의견을 수렴해 '생산적 금융 면책 가이드라인' 마련에 착수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금융사들이 현장에서 겪는 애로사항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면책 기준을 정책에 반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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