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 탓'이라더니…" 직장 성희롱, 진짜 원인은[실험노트]

진화심리학 '본능' vs 젠더위계 '구조문제'
성희롱 원인 두 시각

"성희롱은 욕망 아닌 권력 문제"
美스탠퍼드대 연구진, 구조적 원인에 무게

편집자주지금 먹으면 하나, 기다리면 두 개. 아이들의 선택을 지켜본 마시멜로 실험을 기억하시나요? 단순한 연구는 때로 삶을 보는 방식을 바꿉니다. 실험 데이터로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읽어봅니다.

2018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Me Too·나는 고발한다) 운동은 직장 내 성희롱을 사회 문제로 끌어올린 계기가 됐습니다. 2차 가해를 우려를 해 침묵해온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며 '피해자다움' 통념을 깨뜨리고, 구조적 성차별 문제를 논의할 공론의 장을 열었습니다. 관행처럼 묵인되던 성폭력도 법적 처벌의 대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 이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지난달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직장 내 성범죄 보호 인식' 조사에 따르면 "회사가 직장 내 성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1.4%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픽사베이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픽사베이


처벌받은 사례 역시 많지 않습니다. 직장갑질119가 더불어민주당 박홍배 의원실을 통해 고용노동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직장 내 성희롱 사건 2028건 가운데 과태료가 부과된 사례는 62건(3.1%)에 그쳤고, 실제 처벌로 이어진 경우는 5건(0.2%)에 불과했습니다. 직장 내 성범죄에 대한 인식은 바뀌었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인데, 성희롱의 원인을 다시 짚고 해법을 제시하는 연구가 최근 제시됐습니다.

본능? 권력?…직장 내 성희롱은 원인은

국제학술지 성문화에 게재된 논문에서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연구팀은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진화심리학'과 '젠더위계유지' 이론을 비교하고 설명력·검증 가능성·개입 가능성이라는 기준으로 어떤 이론이 더 과학적으로 타당한지를 평가했습니다.


우선 진화심리학은 성희롱을 남녀 간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남성이 여성의 호감을 과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여성은 자신의 성적 자율성을 위협받는 상황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다고 봅니다.


이로 인해 같은 행동도 남성에게는 호감 표현으로, 여성에게는 위협으로 인식되는 '성적 오해'가 발생할 수 있고 성희롱 역시 이런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입니다.

젠더위계유지 이론은 성희롱을 성적 욕망이 아니라 권력과 지위의 문제로 봅니다. 남성이 더 높은 지위를 점해온 조직 구조 속에서 성희롱은 위계를 유지하고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성적 관심'만으로는 성희롱 문제 설명하기 어려워

연구진이 두 이론을 비교한 결과, 가장 먼저 드러난 차이는 설명 범위였습니다. 진화심리학은 성적 강요나 원치 않는 접근과 같은 일부 상황은 설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성적인 농담, 외모 평가, 음란한 이미지 공유와 같은 행위가 더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이 같은 행동들은 반드시 성적 관계를 얻기 위한 시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지위를 낮추는 데 가깝습니다.


연구에서는 이를 '젠더 괴롭힘(gender harassment)'으로 분류했고, 기존 연구에서도 가장 흔한 형태의 성희롱으로 보고됩니다. 이 지점에서 젠더위계이론이 더 설득력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조직 내 기존의 성별 역할을 강화하고, 남성 중심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검증 가능성이었습니다. 진화심리학의 핵심 가정은 과거 남성이 여성의 관심을 과대 해석한 것이 번식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직접적으로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과거 인류 사회를 실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젠더위계이론은 현재의 조직 구조와 권력관계, 문화 등을 통해 실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검증이 가능합니다. 이 점에서 현실에 적용 가능한 설명으로 평가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성희롱을 줄일 수 있는가'였습니다. 진화심리학은 교육을 통한 인식 개선을 제안합니다. 무엇이 성희롱인지 알리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 따르면 이런 교육은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젠더위계 관점은 구조적 변화를 강조합니다. 조직 내 위계를 완화하고, 지위와 남성성을 연결하는 문화를 약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해법으로 제시됩니다. 개인의 성향보다 환경을 바꾸는 접근입니다.


아울러 연구진은 진화심리학적 설명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는 동시에 일부 가해자의 행동을 '그럴 수 있는 일'로 정당화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성희롱, 본능 아닌 권력 구조의 산물"

연구진은 직장 내 성희롱은 개인의 '본능적 문제'라기보다 조직 내 권력 구조와 문화에서 비롯된 현상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희롱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니라 조직안에 자리 잡은 남성 중심 위계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번 연구는 직장 내 성희롱을 개인의 일탈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연구진은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성 불평등의 원인을 진화적·생물학적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지만, 과학적 기준에 따라 비교·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윤슬기 기자 seul97@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