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박모씨(48) 부부는 20년 가까이 유지했던 청약통장을 최근 해지했다. 과거 경기도의 소형아파트를 소유했던 적이 있어 생애최초 특별공급 대상이 아닌 데다 자녀가 없어 청약가점제로는 서울 지역 인기 아파트 당첨은 언감생심이라는 판단에서다. 박씨는 대신 서울 시내 재개발 예정지의 빌라를 구입해 조합원 분양을 기다리기로 내집마련 전략을 바꿨다.
잇단 강남권 소형 아파트 청약 결과를 놓고 '청약 가점제'의 정책 한계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강남권 아파트를 중심으로 많아야 방 2~3개인 소형 아파트에 '부양가족수'가 당첨의 핵심 변수가 되면서다.
오티에르반포
◆6인 가족이 44㎡ 아파트에 산다고?= 최근 당첨자를 발표한 서초구 잠원동 '오티에르 반포' 청약 결과 전용 44㎡의 당첨 커트라인이 74점, 최고 점수는 79점이란 점이 공개되면서 청약제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가점 74점은 5인 가족, 79점은 6인 가족이라야 받을 수 있는 최고 점수다. 6인 가구가 전용 44㎡ 아파트에 거주한다면 1인당 거주 면적이 7.3㎡에 불과하다. 이는 서울시 조례가 규정한 고시원의 최소면적 7㎡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마저도 이는 침실 외에 주방·욕실 등 생활공간 면적을 모두 합친 것이다.
지난해 11월 분양된 반포 래미안 트리니원이 대표적이다. 전용 59~84㎡ 등 중소형으로만 공급된 이 아파트는 7개 타입 전체의 가점제 커트라인이 70점대였다. 4인 가족은 아무리 무주택 기간이 길어도 남의 떡인 셈이다.
'역삼 센트럴자이' '오티에르반포' '아크로드서초' 이후 지금까지 공급된 강남권 단지들도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가장 낮은 당첨 커트라인이 4인 가구 최대 점수인 69점이었으며, 아크로드 서초에서는 59㎡ C타입 당첨자는 가점제 만점자인 84점 청약자였다.
가족 수와 주택 면적의 괴리는 무주택 기간이나 청약통장 가입 기간보다 오히려 '부양가족수'가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현 청약가점제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별도 소득 있는 세대원도 '부양가족'= '부양가족수'에 포함되는 세대원은 통장가입자 및 배우자의 직계존비속이다. 문제는 세대원의 소득 여부 등은 따지지 않고 단순히 동일 주민등록표에 등재됐는지가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직계존속의 경우 '3년 이상', 30세 이상 직계비속은 '1년 이상'이라는 거주 전제 조건이 붙긴 했지만 정확히는 '부양'이 아닌 '동거'인 셈이다.
이미 민영주택 분양 물량의 절반 이상을 특별공급으로 배정하는데 단순히 가족 수가 많다는 이유로 일반분양에서 혜택을 주는 것은 청약통장에 가입해 장기간 무주택을 유지한 수요자들을 지나치게 청약시장에서 배제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재 민간택지 내 전용 85㎡ 이하 주택의 특별공급 비중은 ▲신혼부부 23% ▲생애최초 9% ▲다자녀 10% ▲노부모 부양 3%다. 최근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분양된 라클라체자이드파인의 경우 전체 공급물량 369가구 가운데 절반이 넘는 189가구가 특별공급분이었다.
◆무주택·통장 가입 기간이 '머릿수'를 못 이긴다?= 부양가족에 유독 많은 점수를 부여한 점도 논란거리다.
가점제 항목별 배점은 ▲무주택기간 최대 32점 ▲청약통장 가입연수 최대 17점 ▲부양가족수 최대 35점이다. 무주택기간은 1년마다 2년씩 점수가 쌓여 15년이면 32점을 받게 된다. 통장 가입연수는 1년마다 1점씩 는다. 역시 15년이면 만점인 17점을 받는다. 부양가족수는 기본 5점을 시작으로 1명당 5점씩 점수가 는다. 부양가족이 6명, 즉 7인 가족이면 최대치인 35점을 받는다.
이 때문에 부양가족 1명이 늘면 통장 가입 및 무주택기간 2년에 가까운 점수를 쌓을 수 있다. 통장 가입 및 무주택 기간 2년이면 총 6점이 늘지만, 부양가족은 1명만 늘어도 5점을 받기 때문이다.
결국 3인 가족(부양가족 2명)이라면 아무리 무주택 기간이 길어도 받을 수 있는 점수는 64점에서 멈춘다. 4인 가족이라도 69점을 넘을 수 없다. 반면 부양가족수에서 만점인 35점을 받게 되면 무주택 기간 및 통장 가입 기간 10년이면 69점으로 이 점수를 채울 수 있다.
◆가점제가 흔든 '선입선출' 원칙= 가점제 도입 이전까지 청약제도가 일관되게 유지해 왔던 '선입선출'의 원칙과도 배치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약제도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부터지만 주택 분양시장에서 청약통장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1980년대 말 수도권 1기 신도시 분양부터다. 당시 1기 신도시에서는 통장 가입 순서대로 공급물량의 일정 배수까지 청약 1순위 자격을 부여한 뒤 이들을 대상으로 추첨으로 당첨자를 가렸다.
이후에도 청약 제도는 시장 상황에 따라 변화를 겪었지만 무주택 기간과 청약통장 가입 기간이 길수록 당첨 우선권을 주는 틀은 계속 유지해 왔다.
하지만 2007년 청약가점제가 도입되면서 '가족 수'가 당락을 가리는 핵심 요소로 변질됐다. 실제 지난해 4분기 이후 서울 강남권에서 분양된 민간택지 아파트 청약 결과를 보면 대부분 '부양가족수'가 당첨 여부를 갈랐다.
높아진 청약 문턱은 청약통장 가입자 이탈로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주택청약종합저축·청약저축·청약부금·청약예금 등 청약통장 가입자는 2605만1929명으로 지난해 10월 말 2631만2993명 대비 26만1064명이 줄었다.
가입자 이탈은 수도권에서 두드러졌다. 서울은 같은 기간 642만5413명에서 635만9013명으로, 인천·경기도 872만7128명에서 863만3226명으로 각각 감소했다.
◆제도 고친다던 국토부는 감감무소식= 부양가족수를 늘리기 위해 위장전입 등이 잇따르자 정부는 2024년 하반기부터 건강보험 요양급여내역을 제출하도록 했다. 주로 다니는 병원이나 약국을 따져 실거주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가점제로 당첨되거나 노부모 부양자 특별공급자로 당첨되면 본인이나 배우자의 직계 존속이나 30세 이상 비속의 요양급여내역을 제출해야 한다.
올해 초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부정청약 논란이 불거진 후 국토부에서도 제도개선 방안을 검토했으나 이후 석 달을 넘긴 현재까지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국토부는 당초 올해 2월 하순 부정청약과 관련한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관계 기관 협의 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를 미룬 상태다. 국토부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청약제도의 구체적인 개편방안이나 시기를 특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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