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를 묻다]이제라도 진실을 피울 준비가 되었는가

정치가 비극을 진영싸움에 끌어들이며
죽은자는 추모의 대상에서 멀어져버려
피해자의 침묵이 강요되던 시대를 지나
특정한 해석만 허용하려는 분위기 강해
진영논리 벗어나 복합적 진실 마주해야

[時代를 묻다]이제라도 진실을 피울 준비가 되었는가

"제주 4·3은 원래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시작됐으나, 억울한 양민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많이 희생됐다."(1998·김대중 대통령)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2003·노무현 대통령)

"4·3을 기억하며 국가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민·형사 시효 제도를 폐기하겠다."(2026·이재명 대통령)


세 대통령의 제주 4·3에 관한 언급은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며 그 농도는 점점 짙어진다. 78년 전 제주의 4월은 잔인했고 흔적은 처참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기억은 흐릿한데 상처는 되새겨지고 있다. 얼마 전 세월호 추모식에서 대통령이 12년 전 바다 참사를 다시 소환했다.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민족이다. 잊힐 만하면 불러대는 원한과 분노가 고이 잠들 날은 언제쯤일까. 6·25전쟁을 빼면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제주 4·3은 좌익폭동인가, 국가폭력인가. 필자는 감히 말한다. 4·3은 어느 한 진영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대한민국이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역사의 짙은 상흔이다.


남로당 세력의 무장봉기로 시작된 4·3은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작과 전개를 갈라놓고 어느 한쪽만 붙들면 진실은 곧잘 왜곡된다. 광복 직후의 혼란, 좌우 이념의 충돌, 미군정과 단독선거를 둘러싼 갈등이 한 섬에 응축되며 폭발한 참극이었다.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로 촉발된 이 사건은 6·25를 거치고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 해제 때까지 1만5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두 배라는 주장도 있다. 군인·경찰·남로당·좌우익 단체는 물론 그 가족과 영유아·노인·부녀자까지 남녀노소와 모든 계층을 망라한다. '제주도 1호 목사' 이도종은 좌익에, 언론인 김호진은 우익에 당한 그 분야 첫 희생자다.

진압 경찰로는 역부족이 되자 군이 투입됐다. 9연대장 김익렬은 주모자 김달삼(평양 애국열사릉에 묘가 있다)과의 4·28 평화협상이 무산되고 경찰과 불협화음으로 경질됐다. 후임 박진경마저 부임 한 달 만에 남로당과 연계된 부하의 총탄에 쓰러지자 진압군 측은 더욱 강경해졌다. 제주 출동을 거부한 군의 여순사건까지 잇달아 섬의 비극은 깊어졌다.


관공서 습격과 방화, 경찰과 가족 살해, 선거 방해와 체제 전복을 노린 무장행동이 이 사건의 엄연한 출발점이다. 그 외는 출발선을 흐리기 위한 곁가지다. 그렇다고 이것이 국가 과잉진압의 면책 논리로 쓰여서는 안 된다. 잔인한 살상은 좌우익이 따로 없었고 진압군에 의한 희생이 훨씬 많았다. 마을이 불타고 죄 없는 주민이 '빨갱이'로 몰려 죽어간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모든 중산간 부락 등 130여마을이 사라졌다. 무고한 희생에는 명예회복과 보상이 따라야 한다. 다만 공산 무장병력 지휘관, 남로당 핵심 간부, 살인·방화 주도 세력 등은 제외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2001·2009년)은 존중돼야 한다. 우파 입장에선 좌익 범법자를 최소화한 데 불만일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국가폭력을 단죄한다면서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일반 군·경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당시의 급박함을 오늘의 논리로 재단하는 어리석음도 피해야 한다.


필자에게 4·3은 문헌 속 사건을 넘어선다. 어린 시절, 읍내 우리 학교에 전학 온 제주 아이의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들어 온 교실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 그 아이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훗날 떠올리며, 4·3의 또 다른 밑바닥을 생각해본다. 언어와 풍속이 다른 섬, 외지인에겐 낯선 공동체, 그리고 그 낯섦 위에 덧씌워진 이념의 공포. 서로 이해 못한 사회는 끝내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 소작농과 문맹자가 다수인 가난한 농어촌은 사회주의, 공산혁명의 온상이 된다. 정부수립 직전·후인 당시 경찰과 군인의 교육훈련은 많이 부족했고, 빨치산 등 무장봉기대는 알지도 못하는 이념에 세뇌된 상태였다. 총·칼(일본도)·죽창·곡괭이 등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 아비규환이었다. 불타는 집에서 갇혀 죽거나 생매장당한 경우도 있다.


내 정치 기반인 부산 영도는 4·3에서 탈출한 제주민의 은거지였다. 이들은 서로를 '삼촌'이라 부르고 '괸당'의 정을 나누며 어제를 잊고자 오늘에 충실했다. 이들에게 4·3은 이념이 아닌 처절한 생존사였다. 개개인의 사연 속에는 비극의 심연이 있다. 그래서 나는 국회에서 제주 출신 세 의원(변정일·양정규·현경대) 주도의 4·3 특별법 논의에 기꺼이 동참했다. 국회의장 시절에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을 만나 평화공원 조성 후 3부 요인으로선 처음으로 참배했다.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진보·보수를 떠나 국가의 품격이며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4·3을 절반의 언어로만 말한다. 예전엔 피해를 말하면 용공으로 몰렸고, 지금은 국가폭력을 언급하지 않으면 수구 꼴통 취급을 받는다. 강경 진압만 강조하면 발화점이 지워지고, 좌익폭동만 역설하면 억울한 희생이 희석된다. 정치가 비극을 진영 싸움에 끌어들이는 순간, 죽은 자는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동원의 도구로 전락한다. 침묵이 강요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특정한 해석만 허용하려는 분위기가 드세다. 둘 다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객관적 자료와 증언을 통해 복합적인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4·3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도 냉전의 압축판에서 터진 생생한 기록들을 인류의 유산으로 삼기 위함이 아닌가. 이 점 정부와 지자체는 추진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엄중히 되물어야 한다.


4·3의 교훈은 분명하다. 폭동은 폭동대로 짚고, 잘못은 잘못대로 책임져야 한다. 그래야 희생자의 명예와 국가의 도덕성이 회복된다. 한쪽의 죽음만 애도하고 다른 쪽의 진실을 묵살하면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이다. 자유나 인민해방의 이름으로 무고한 생명을 짓밟아서는 안 되며, 국가폭력을 반성하되 무장봉기의 실체까지 지워서는 안 된다. 4·3 바로보기는 한쪽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자기 역사 앞에서 얼마나 정직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일이다. 정치는 죽이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살길을 찾는 지혜여야 한다. 제주의 비바람은 4·3의 상징인 붉은 동백꽃을 수없이 피웠다 지우며 오늘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또다시 편 가르고 갈라치기하는 세력에 이용당하지 않을 각오가 되었는가, 이제라도 진실에 다가설 준비가 되었느냐고. 불타는 양심과 나라 사랑의 마음으로 답할 때만 4·3은 과거의 상처를 넘어 공동체를 성숙시키는 살아있는 경고가 될 것이다. 동백은 반드시 다시 핀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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