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차녀 서호정씨에게 300억원 규모의 지분을 증여하면서 승계 구도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장녀인 서민정씨가 장기휴직에 들어가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가운데 차녀에게 지분 승계가 쏠리면서 국내 1위 화장품 기업의 후계자를 둘러싼 자매간 경쟁이 본격화한 모습이다.
왼쪽부터 아모레퍼시픽 장녀 서민정씨와 차녀 서호정씨. 아모레퍼시픽
2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지난달 27일 차녀 호정씨에게 보통주 19만주를 증여했다. 이는 아모레퍼시픽 발행주식 총수의 0.27%로, 금액으로는 약 300억원 규모다. 이번 거래로 서 회장의 아모레퍼시픽 지분율은 기존 9.02%(622만8072주)에서 8.74%(603만8072주)로 0.28% 포인트 낮아졌지만,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지배구조 변화는 없다.
회사 측은 호정씨가 서 회장으로부터 지주사인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주식을 증여받은 뒤 증여세를 연부연납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이번 증여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앞서 서 회장은 2021년 2월 아모레퍼시픽홀딩스 보통주 10만주를 호정씨에게 증여한 데 이어 2023년 5월에도 보통주 67만2000주와 우선주 172만8000주를 넘겼다.
업계에서는 이번에 증여된 아모레퍼시픽 지분으로 세금 재원을 마련하는 한편, 호정씨의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보통주를 현금화해 세금 부담을 해소하면서 동시에 향후 우선주의 보통주 전환을 통해 그룹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호정씨는 지난 2월9일~20일 아모레퍼시픽 주식 7880주와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주식 25만6795주를 장내 매도했다. 호정 씨가 매도한 아모레퍼시픽 지분 규모는 약 12억원,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지분은 약 89억원으로 총 101억원 규모를 팔았다.
호정씨가 매각한 주식은 의결권 있는 보통주로, 2029년 보통주로 전환되는 우선주 172만8000주는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이는 지주사 우선주 기준 지분율 12.77%에 해당하는 규모다. 해당 우선주는 의결권이 없고 보통주보다 주가가 낮아 증여세 부담은 적지만, 향후 보통주 전환 시 지분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 영향력은 줄어들지만, 향후 그룹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승계 방식인 셈이다.
서 회장의 장녀 민정씨는 오랫동안 아모레퍼시픽그룹의 후계 1순위로 거론됐다.
2012년 서 회장으로부터 에뛰드 주식 14만1791주(지분율 19.5%), 에스쁘아 3만9788주(19.5%), 이니스프리 4만4450주(18.18%)를 증여받은 바 있다. 당시 시장에서는 향후 경영권 승계를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민정씨는 2022년 9월 에뛰드와 에쓰쁘아 지분을 전량 처분했다. 해당 주식은 각각 무상감자와 유상감자 방식으로 소각됐다. 이어 2023년 6월에는 자신이 보유하던 이니스프리 지분 2만3222주(9.5%)를 서경배과학재단에 기부하며 사실상 증여받은 지분의 절반을 내놨다.
1991년생인 민정 씨는 코넬대 경제학과 졸업 후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컴퍼니에서 경력을 쌓은 뒤 지난 2017년 1월 아모레퍼시픽 오산공장 SCM SC 제조기술팀 평사원으로 입사한 바 있다. 이후 6개월간 근무한 후 퇴사해 2년간 중국 장강 경영대학원 MBA를 수료했다. 2019년 아모레퍼시픽 뷰티영업전략팀에 재입사했지만, 2021년 이혼 이후 아버지인 서 회장과의 갈등설이 불거진 데 이어 2023년 7월 장기휴직에 들어간 뒤 현재까지 휴직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차녀 호정 씨(1995년생)는 2018년 미국 코넬대학교 호텔경영학과 졸업 후 오설록으로 입사했다. 지난해 7월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자회사 오설록 PD(Product Development) 팀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제품 개발 및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룹의 신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오설록이 호실적을 내고 있는 점도 차녀 승계 구도를 떠받치고 있다. 오설록은 지난해 연 매출 1108억원을 기록하며, 분사 이후 처음으로 연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바 있다. 영업이익 역시 2021년 32억원에서, 2024년 92억원으로 3배 가까이 성장한 뒤 지난해에는 115억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100억원을 넘어섰다. 최근에는 CJ올리브영의 웰니스 플랫폼 '올리브베러'에 티 바를 운영하는 등 웰니스 영역으로의 외연 확장도 이어가고 있다.
서 회장은 지난해 창립 80주년 기념사에서 오설록과 이너뷰티 등 웰니스 영역과 미용 기기 등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아 향후 10년 내 매출 15조원 규모의 글로벌 뷰티&웰니스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창업주 고(故) 서성환 선대회장의 어머니인 윤독정 여사가 개성에서 직접 머릿기름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며 시작한 기업이다. 이후 서성환 선대회장이 '태평양화학'을 설립해 기반을 다졌고, 이를 토대로 현재의 아모레퍼시픽그룹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승계 역시 전통적인 '장자 중심' 공식에서 벗어났다. 서경배 회장은 차남이었지만,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화장품 사업을 이어받아 글로벌 뷰티 기업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능력 중심 승계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같은 전례는 현재 후계 구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장녀 우선'이 아닌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 만큼 향후 승계 방향이 주목을 받고있다. 현재 장녀 민정 씨와 차녀 호정 씨의 지분율(보통주·우선주 합산)은 각각 2.84%, 2.28%로 격차는 0.56%포인트에 불과하다. 향후 호정 씨가 가진 우선주의 보통주 전환 효과를 감안하면 두 자매간 지분율 격차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서 회장이 보유한 아모레퍼시픽 홀딩스 지분 4525만1829주(50.28%)가 향후 후계 구도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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