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는 미국이 글로벌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이 체제는 금본위제도(화폐의 가치를 일정량의 금에 연결해 통화가 금으로 교환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통화제도)와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설립을 통해 전후 국제경제의 안정을 도모토록 한 발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인 전제가 있다. 바로 '자유무역의 보장'과 '해상교통로의 안전 확보'라는 미국의 전략적 선택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산업 역량과 더불어 전 세계 해양을 통제할 수 있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냉전 구도 속에서 미국은 소련을 봉쇄하고 동맹을 확대하기 위해 하나의 암묵적 질서를 제시했다. 즉, 미국 중심 질서에 편입될 경우 안전한 해상 교통로를 제공하고 자유로운 무역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경제협력 약속을 넘어 해양 질서를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국제경제 체제의 출발점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었다. 냉전기 미국은 자유시장경제가 공산주의의 계획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동맹국들의 경제적 번영이 필수적이었다. 미국은 자국의 해군력을 동원해 글로벌 해상 교통로의 안전을 보장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서방세계의 경제적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 경제난에 허덕이던 구소련 진영의 붕괴는 미국의 전략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오늘날 우리는 공해에서의 '항행의 자유'를 당연한 국제규범으로 받아들이지만, 역사적으로 바다는 결코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시대 해양은 철저히 힘의 논리로 지배됐다. 해군력이 없는 국가는 상선을 보호할 수 없었고 이는 곧 무역 자체가 불가능함을 의미했다. 당시 해상무역은 군함의 호위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웠으며 각국은 주요 항로와 항구를 군사적으로 장악해 타국의 접근을 차단했다.
영국이 지브롤터, 수에즈 운하, 싱가포르를 점령한 것도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인도와 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식민지에 자국 선박만 입항하도록 제한하는 '배타적 경제체제'를 유지했으며, 외국 선박은 해군에 의해 나포되거나 격침되기도 했다. 해양은 곧 군사력의 연장선이었고, 무역은 힘의 산물이자 식민지 수탈 수단이었다.
'항행의 자유'란 개념은 오랜 역사적 갈등과 논쟁을 거쳐 형성됐다. 17세기 해양자유론이 제기된 이후 수 세기에 걸친 국제적 대립과 협상을 통해 바다는 점차 공공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2년 유엔 해양법 협약(UNCLOS)을 통해 제도적으로 정립됐다. 이 협약은 영해, 공해, 국제해협, 무해통항권, 통과통항권 등 현대 해양질서의 핵심 개념을 확립하며 사실상 '바다의 헌법'으로 기능하게 됐다.
국제해협은 국제 교역의 필수 경로이기 때문에 연안국의 주권보다 전 세계의 원활한 통행에 더 큰 무게를 둔다. 공해가 누구의 소유도 아닌 광활한 광장이라면, 국제해협은 남의 집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공공 도로인 셈이다. 즉, 국제해협은 특정 국가의 영토적 권리보다 글로벌 경제의 공공재로 간주된다. 호르무즈 해협이 대표적인 국제해협이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구축한 국제질서는 단순한 금융·통화 체제가 아니라 해양 질서와 결합된 정치·경제적 구조였다. 미국은 해군력을 통해 바다를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자유무역 체제를 확립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세계 경제의 작동 원리는 사실상 이러한 힘의 균형과 전략적 선택 위에 구축된 것이다.
지난 9일 오전(한국시간)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는 여전히 수많은 유조선과 화물선들이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실시간 선박 위치 안내 사이트에 나타나고 있다. 마린트래픽
지금의 호르무즈 해협 사태는 이러한 원리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 해협은 전 세계 에너지 수송의 핵심 통로로, 글로벌 경제의 동맥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 무역의 약 80%가 해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특정 해협의 봉쇄는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세계 경제 전체를 위협하는 사안이 된다.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통행 제한이나 통행료 부과 시도는 국제법상 통과통항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평가되며, 글로벌 공급망에 심각한 충격을 초래할 수 있다.
이란의 해협 봉쇄에 미국이 역 봉쇄 입장을 밝힌 것은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니라, 전후 국제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이는 우리나라와 같은 해양 의존 국가에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와 산업 구조 전환이라는 근본적 과제를 다시금 던져준다. 특히 이러한 충돌은 '에너지 섬' 대한민국에는 치명적이다. 우리는 에너지원의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며, 그 모든 물량이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당장 유조선이 멈춰 서고 국가 경제의 동맥경화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한 물류 대란을 넘어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해상 교통로의 안정성이 우리의 생명선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존 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단기적으로는 국제사회와 공조해 항행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의 수입 에너지 의존도와 경제적 역량에 걸맞게 국제법에 근거한 바다의 질서 유지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7일 청와대에서 프랑스·영국이 주도하는 호르무즈 해협 자유항행에 관한 화상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이라크, 싱가포르 등 50여 개국 정상·대표들이 호르무즈 해협 항행의 자유를 위한 국제적 노력, 선원 안전 및 선박 보호, 전쟁 종식 후 항행 안전보장을 위한 실질적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청와대 제공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7일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자유 통항을 위해 열린 국제 정상회의에 참석한 건 매우 긍정적이다. 회의는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 아래 50개국 정상들이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했다. 화상으로 함께 한 이 대통령은 "항행 자유 보장을 위해 실질적인 기여를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다. 첫째, 에너지 공급선 다변화와 함께 원자력과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높여 '에너지 믹스'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 특정 지역, 특정 에너지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외부 충격에 우리 경제 전체를 인질로 잡히게 하는 족쇄가 될 뿐이다. 둘째, 석유화학 중심의 산업 구조를 수소와 전기를 기반으로 하는 미래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유가 변동에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을 선도하고 국가 생존을 위한 '플랜 B'를 마련하는 길이다.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고 해양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경쟁이 격화되는 지금, 바다의 자유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됐다. 이번 호르무즈 사태는 우리에게 값비싼 교훈을 주고 있다. 항행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지키고 활용하는 능력이야말로 해양국가인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점이다. 위협받는 바닷길 위에서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할 때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교수(전 통상교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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