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트럼프'로 불리는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유럽연합(EU)과 국제 정세에 상당한 지형 변화가 예고됐다. 16년 만의 정권 교체로 인해 미국과 러시아는 EU에서 든든한 우군을 잃게 됐다. 야당인 티서당의 마자르 페테르 대표는 선거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미·러 정상에게 전화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등 친(親) EU 노선을 확실하게 굳혔다.
헝가리 국가선거위원회에 따르면 총선 결과 전체 199석 중 138석을 야당인 티서당이 확보했다. 여당인 피데스당은 55석을 얻었다. 티서당은 전체 의석 중 3분의 2인 133석을 목표로 했는데, 이를 초과 달성하며 단독으로 주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을 확보했다. 헝가리는 의원내각제 국가다.
헝가리 총선에서 승리한 티서당의 마자르 페테르 대표.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총선은 미국·러시아와 EU의 대리전이나 다름없어 올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로 꼽혔다. 오르반 총리는 그간 미국·러시아와 밀착 행보를 보였던 인물이다. 대러 제재, 우크라이나 지원 같은 EU의 주요 정책 결정에서 사사건건 대립하며 발목을 잡았다.
그는 유럽 극우 세력의 롤모델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했다. EU의 공동 이익보다 헝가리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번 선거 결과가 유럽 극우와 미국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의 회복력을 시험하는 시험대로 여겨진 이유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오르반 정부 고위 인사가 러시아와 EU 기밀 정보를 논의하는 녹취록이 공개되며 발목을 잡혔다.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마자르 대표는 13일(현지시간) "헝가리는 더는 러시아의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라 유럽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미·러 정상에게 전화하지 않겠다며 관계 재설정을 시사했다. 전날 총선 승리 연설에서는 "헝가리는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거 승리 후 폴란드와 관계 복원에 시동을 걸며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외교 노선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유라시아그룹의 무즈타바 라흐만 유럽 담당 매니징 디렉터는 "이번 선거 결과는 유럽의 판도를 바꿀 변곡점"이라고 평가했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이번 헝가리 총선의 승리자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우크라이나 등을, 패배자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유럽 우익 세력 등을 꼽았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번 선거 결과로 오르반 총리를 재집권시키려 했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분석했다.
이번 총선 결과로 인해 EU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정세 변화가 예상된다. EU는 내부 걸림돌이 사라지며 더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우크라이나도 그간 헝가리의 반대로 가로막혔던 차관 제공과 대러 추가 제재 등 주요 현안을 타진해볼 여지가 생겼다. 오르반 총리는 지난해 12월 EU가 합의한 우크라이나에 900억유로 규모 차관을 제공하는 방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상황에서 EU의 결속력을 약화할 주요 동맹이자 정보원을 잃게 됐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오르반 총리가 패배를 인정한 지 불과 17분 만에 기다렸다는 듯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옛 트위터)에 "헝가리는 유럽을 선택했다"고 적었다.
그간 공개적으로 오르반 총리를 지지했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은 체면을 구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개월간 다섯 차례나 오르반 총리 지지 발언을 했다. 밴스 부통령은 한창 전쟁 중인 이란과의 협상장보다도 먼저 헝가리를 방문해 오르반 총리의 승리를 기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헝가리 총선 결과 관련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AP 통신은 "오르반 총리의 패배는 전쟁으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이 해외의 우호 정치인들을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해졌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CNN은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포퓰리즘의 막다른 골목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특히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헝가리 총선 결과는 트럼프 행정부에 악재다. 오르반 총리의 보수주의 포퓰리즘, 반이민 등 정책은 트럼프 대통령의 마가 운동과도 맞닿아 있다. 미 민주당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경고가 쏟아졌다.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이제 11월에는 의회에 있는 트럼프 추종자들과 마가 극단주의자들의 차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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