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의 작가가 이번에는 숯보다 흙을 먼저 꺼냈다. 원주 뮤지엄 SAN에서 열린 이배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거대한 검정의 전시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검정의 출처를 더듬는 전시에 가깝다.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 본관 입구에 전시된 현대미술작가 이배의 '불로부터(Issu du feu)'. 높이 8m, 폭 5m, 무게 7톤에 이르는 대작으로, 정월대보름 때 짚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는 '달집태우기'에서 착안해 염원을 담은 기둥을 형상화했다. 뮤지엄산
이배를 세계 미술계에 각인시킨 것은 숯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 숯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태우고 무엇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는지를 먼저 묻는다. 회고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시선은 뒤로 간다. 완성된 조형의 높이보다 그것을 떠받친 대지와 몸의 기억을 먼저 꺼내 보인다.
그 판단을 가장 선명하게 굳히는 곳이 청조갤러리 3의 'Becoming'이다. 바닥에는 청도에서 옮겨온 흙이 깔리고, 9m 스크린에는 논 위에서 직접 붓질하는 작가의 몸이 걸린다. 전시 기간 동안 식물은 자라고 스러진다. 여기서 이배의 작업은 더 이상 숯이라는 물질의 숭고함에만 기대지 않는다.
맨발의 행위, 흙을 미는 반복, 생장이 지나가는 시간까지 한 화면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의 검정은 추상이기 전에 노동이었고 정신성이기 전에 생업의 기억이었음을 드러낸다. 이 전시가 새롭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숯의 결과를 보여주는 대신, 숯이 되기 전의 생애를 전시장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점이다.
6일 뮤지엄산에서 이배(70)가 싸리비로 흙을 쓰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모습. 그는 이 퍼포먼스가 종이에 큰 붓으로 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뮤지엄산
이배의 최근 궤적을 떠올리면 이 변화는 더 또렷해진다. 2023년 록펠러센터의 'Issu du feu'는 도시 한복판에 숯의 수직을 세운 작업이었다. 2024년 베니스의 'La Maison de la Lune Br?l?e'는 달집태우기라는 제의와 숯의 상징성을 전면으로 밀어 올렸다. 2025년 베를린 'Syzygy'는 '불로부터'와 '붓질'을 통해 공간 전체를 숯의 문법으로 장악했다.
그 흐름을 따라오면 이배는 점점 더 크고, 더 기념비적이고, 더 완결된 형식으로 나아가는 작가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번 SAN전은 거기서 한 걸음 비켜선다. 높이를 더하는 대신 바닥을 다시 판다. 기념비의 정점이 아니라 그 기념비를 낳은 근원을 묻는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인상적인 것은 8m짜리 '불로부터' 자체가 아니다. 물론 그 작업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야외 '무의 공간'에 세운 10m 높이의 '붓질' 연작도 뮤지엄 SAN의 산세와 건축을 타고 오르며 충분한 장관을 만든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거대한 작품들조차 절정이라기보다 증언처럼 보인다. 저 높이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있었는지를 거꾸로 말해주는 증언 말이다.
이배 개인전 중 청조갤러리 로비에 설치된 '붓질'. 뮤지엄산
이배가 스스로 이번 전시를 '근원부터 다시 돌아보는 데 집중한 시간'이라고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무엇을 꿈꾸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다시 보았다고 했다. 거대한 숯 기둥 앞보다 흙이 깔린 방에서 그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다.
뮤지엄 SAN이라는 장소도 이번에는 다르게 작동한다. 이 미술관은 대개 전시를 정갈하게 만든다. 안도 타다오의 콘크리트, 자연광, 침묵, 원주의 산세는 웬만한 작업을 금세 명상과 치유의 언어로 번역해버린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그 번역을 마냥 따르지 않는다. 흙이 들어오고, 몸이 지나가고, 농사와 노동의 기억이 들어오는 순간, SAN의 고요는 조금 거칠어진다.
이 거칠어짐이 좋다. 이배의 작업을 지나치게 숭고한 검정으로만 읽게 만들었던 안전한 해석을 깨기 때문이다. '숯의 작가'라는 편한 호명이 여기서 비로소 흔들린다. 그는 이번에 숯을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숯으로 가기 전의 시간을 들고 나왔다.
뮤지엄 산에서 열리는 이배의 개인전 중 '무의 공간'에 설치된 '붓질'. 이배 특유의 숯 질감을 흉내 낸 청동 구조물로, 뮤지엄 산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뮤지엄 산
결국 'En attendant: 기다리며'의 성취는 기다림을 아름답게 포장한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전시는 기다림을 몸의 일로 되돌린다. 기다림은 여기서 멈춰 선 명상이 아니라, 타고 남고, 다시 자라고, 쓸고, 버티는 과정이다. 이배는 오래도록 검정으로 말해온 작가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더 오래 남는 것은 검정 그 자체가 아니다. 그 검정 밑에 깔린 흙이다.
그 흙을 다시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이배의 30년을 정리하는 회고전이면서 동시에 그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전시다. 숯의 작가가 이번에 우리 앞에 내민 것은 숯의 완성이 아니라 숯의 근원이었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