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사태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오르내리는 등 요동치면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향방에도 불확실성이 드리웠다. 한은은 2월 금융통화위원회의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통방)에서 금통위원들의 향후 6개월 후 조건부 금리 전망인 'K점도표'를 제시, 상당 기간 동결을 시사하며 그간 인상 우려를 반영했던 시장에 안도감을 줬다. 그러나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으로 통화정책의 우선순위인 물가 안정이 위협을 받자 잦아들었던 연내 인상 가능성까지 재차 고개를 드는 모습이다. 시장은 국제유가 폭등의 배경인 전쟁의 장기화 여부가 통화정책 방향성을 가를 핵심 요소로 보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음 달 10일 열리는 금통위에선 금통위원들의 향후 3개월 금리 전망이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으로 나뉘어 정성적으로 제시된다. 지난달 새로 도입된 K점도표는 경제전망이 있는 2·5·8·11월에만 공표되기 때문이다. 시장은 원유 공급 충격 등에 한은이 이른 시일 내에 금리 인상으로 대응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봤다. 다만 3개월을 넘어서는 장기 시계에서 인상 가능성이 2월 대비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관심사다. 이는 통방 당일 이창용 한은 총재의 입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기준금리 향방의 첫 번째 변수는 물가다. 물가가 뛰면 금리는 상승 압력을 받는다. 한은은 미·이란 전쟁 직전인 2월26일 발표한 경제전망에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2%로 제시했다. 한은의 물가상승률 목표치(2.0%)에 근접한 수준으로, 연평균 국제유가(브렌트유)를 배럴당 64달러로 전제한 결과다. 한은은 상반기 유가를 배럴당 평균 65달러, 하반기 유가를 63달러로 예상하면서 "국제유가는 최근 미·이란 간 군사적 긴장 고조로 상당폭 상승했으나 연중으로는 초과 공급 상황이 이어지며 점차 낮아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이란 공습이 본격화하고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이어지며 사태가 악화하자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웃도는 등 치솟았다.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들어오는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유가 급등에 따른 물가 상승 등 파급 효과가 큰 국가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결국 배럴당 100달러 전후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고유가 상황이 얼마나 지속되는지가 관건이라고 봤다. 유가 레벨과 지속 기간이 '연평균 배럴당 64달러' 전제를 얼마나 끌어올리냐에 따라 안정권(2.2%)을 예상한 물가 전망이 기준금리 인상을 불러올 만큼 뛸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길어질 가능성에 대해선 여전히 시장 의견이 갈리고 있으나, 유가가 폭등하면서 최악의 시나리오 역시 염두에는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짙어진 모양새다. 최지욱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전쟁이 4~5주 이내에 마무리되고 이후 원유 가격이 전쟁 발발 이전 수준으로 점차 내려온다는 전제하에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한은 전망치와 같은) 2.2%로 본다"면서도 "현재 수준의 유가 상승이 1개월간 지속된 후 점차 내려올 경우, 전체 소비자물가는 향후 12개월간 0.22~0.36%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연평균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기록하는 등 사태가 크게 악화할 경우 물가는 1.1%포인트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연평균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일 경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0.3%포인트 하락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포인트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최 연구원은 "전쟁 장기화 가능성이 없지 않은 만큼 올해 소비자물가 및 근원물가 전망에는 상방 압력이 우세한 상황"이라며 "만약 전쟁이 3개월 이상 지속되고 유가가 계속 상승할 경우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짚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 한은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환율과 부동산 등 불안한 금융 안정 상황의 전개 양상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9일 원·달러 환율 주간 종가(오후 3시30분 기준)는 1495.5원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12일(1496.5원) 이후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전날 장중 1500원 선을 위협했던 환율은 1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전 거래일 종가 대비 24.7원 내린 1470.8원에 개장하며 일단 숨 고르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비록 큰 폭으로 반락하며 전날의 오버슈팅을 일부 되돌렸으나, 여전히 1470원대 고환율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펀더멘털과 괴리가 큰 환율 레벨과 하루 만에 수십 원이 오르내리는 높은 변동성은 기준금리에 상승 압력을 주는 요인이다. 수입 물가 상승을 거쳐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장에선 고환율 상황 지속으로 당장 금리 인상이 고려되진 않겠으나 물가 상방 압력을 높이는 주요 요인으로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고 봤다. 김지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한은은) 지난 1월 금통위를 기점으로 사실상 동결 기조로 전환했다"며 "한국은 경기 외에도 부동산과 환율 등 기준금리를 인하하지 못할 이유가 많다. '경기 침체'가 아니고서는 인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지정학적 위험에 면역력이 강한 인공지능(AI) 주도의 반도체 경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환율 변동성에 따른 금융 불안정, 고유가 영향에 의한 물가 상승(인플레이션) 우려는 금리 인상 가능성을 높인다는 설명이다.
9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 코스피와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금통위원들 역시 당분간 금융 안정 상황을 집중적으로 고려할 전망이다. 이 총재는 2월 통방 후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환율이 1420원 선까지 레벨을 내렸음에도 "환율이 안정됐다고 보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안심하기 이른 상황(이라는 것)"이라며 "금통위원들 입장에선 물가뿐만 아니라 금융안정 상황에 대한 고려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정책금리 인하 지연 여부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글로벌 주요 투자은행(IB)에선 부진한 고용지표에 노동시장 둔화 우려가 커지자 여전히 상반기 인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중동 리스크와 관련한 인플레이션 상승 우려는 미국 금리 인하를 하반기로 지연할 수 있는 요인으로 꼽힌다. 이는 현재 미국 정책금리 상단(3.75%) 기준 1.25%포인트 수준인 한미 금리차 축소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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