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고독한 파수꾼: 한은 총재가 짊어질 무게

아서 번스의 실책과 폴 볼커의 승리의 교훈
확장재정의 시대, '인플레이션 조세'라는 고지서
통화정책, 거시경제의 심박수를 조절하는 일
가계부채의 늪과 대외 파고: 파수꾼의 딜레마

[시시비비]고독한 파수꾼: 한은 총재가 짊어질 무게

최근 글로벌 경제의 화두는 중앙은행을 향한 정치권력의 거센 공세다. 일본에서는 30년 만의 금리 정상화를 추진하는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확장 재정을 앞세운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사나에노믹스'라는 벽에 부딪혔고,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압박하며 입맛에 맞는 '꼭두각시 Fed'를 구상 중이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미 Fed 의장 지명자 케빈 워시가 경고해온 '역(逆)로빈후드 정책(돈 풀기가 자산 가격만 높여 부자의 배만 불리는 현상)'은 중앙은행이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가 무엇인지 상기시킨다. 이제 시선은 4월 임기 만료에 따른 한국은행 총재직의 향방과 연말까지 이어질 수뇌부 교체로 향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월2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2026.02.26 사진공동취재단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월2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2026.02.26 사진공동취재단


우리는 역사 속에서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잃었을 때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를 보았다. 1970년대 미 Fed 의장 아서 번스는 재선을 앞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금리 인하 압박에 굴복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물가는 12%까지 치솟았고 경제는 통제 불능의 늪에 빠졌다. 이를 되돌리기 위해 후임 의장 폴 볼커는 살해 협박과 비난 속에서도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는 초강수를 둬야 했다. 번스가 남긴 '정치적 순응'의 대가를 미국 사회 전체가 볼커의 '고독한 결단'을 통해 치유한 셈이다. 이 역사는 통화정책의 독립성이 단순한 자존심이 아닌,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임을 보여준다.


현재 이재명 정부의 시계는 'AI 대전환'과 경기 부양을 위한 728조원 규모의 확장재정이라는 톱니바퀴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필자가 누차 강조했듯, 세입 대책 없는 지출 확대는 결국 물가 상승이라는 이름의 고지서로 돌아온다. 이는 서민의 지갑을 가장 잔인하게 털어가는 '인플레이션 조세'이자, 국민에게 고지서도 없이 부과되는 비겁한 세금이다. 정부가 정책적 선의를 강조하며 재정 액셀을 밟을 때, 누군가는 화폐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독하게 금리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그것이 파수꾼의 숙명이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가계와 기업의 대출금리라는 실핏줄부터 시작해 환율, 주가, 그리고 집값에 이르기까지 경제 전반에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가 경제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심박수를 조절하는 일과 다름없다. 이처럼 거시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막중한 영향력을 가진 자리이기에, 정부는 차기 수장과 금통위 등 수뇌부 구성에 있어 정치적 이해득실을 넘어선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현 이창용 총재가 지난 임기 동안 보여준 강단은 시장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가 마주했고, 또 앞으로의 수장이 짊어질 무게는 갈수록 버거워지고 있다. 19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의 거대한 시한폭탄이다. 금리를 올리자니 가계의 비명이 가슴을 찌르고, 내리자니 부채 폭증과 자산 거품이 국가의 미래를 위협한다. 여기에 중동 전쟁 등의 지정학적 리스크로 요동치는 환율과 '트럼프 관세'의 불확실성은 정책의 선택지를 더욱 좁게 만든다. 결국 파수꾼은 '오늘의 고통'과 '내일의 파열' 사이에서 오직 국가 경제의 기초체력만을 이정표 삼아 걸어가야 하는 외로운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중앙은행 총재는 정부 정책의 뒷배가 되는 동행자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정부와의 인위적인 화음이 아니라, 경제의 건강을 위한 '필요한 불협화음'을 견디는 뚝심이다. 설령 그것이 권력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라 불릴지라도, 화폐 가치를 사수하는 관점에서는 국민을 향한 지고(至高)의 충성이 된다.

4월의 선택이 현 총재의 연임이든,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든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연말까지 이어질 금통위원과 부총재 등 한은 수뇌부의 개편은 한국 경제의 향방을 가를 중차대한 변곡점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정권의 입맛에 맞추는 순응적인 수장이 아니다. 재정의 폭주가 물가를 위협할 때, 오직 데이터와 국가의 미래만을 이정표 삼아 금리라는 방패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인물이다. 정부는 정치적 계산기 대신 경제의 근간을 지킬 수 있는 혜안으로 인사에 임해야 한다. 권력의 시나리오보다 국민의 삶을 우선시하는 '정직한 거부'의 용기, 우리는 그런 강단 있는 파수꾼을 기다리고 있다.





이선애 금융부장 lsa@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