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과학기술부총리 직제가 부활하자 과학계와 산업계는 "과학기술 위상 강화"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실질 권한이 담보되지 않으면 '명패만 바뀐 자리'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을 내놨다. 민간이 초고속으로 달리고 정부는 뒤쫓는 구조가 고착돼 "정책 설계·집행의 리더십이 공허해졌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만큼, 과기부총리가 보다 강력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바람도 나온다.
과학기술계는 과거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는다. 과기부총리 제도는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 도입됐다. 오명 부총리 시절 관계장관회의는 '최고 참석률 회의'로 불릴 만큼 영향력이 강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과학기술 업무 효율화를 위해 예산권을 과기부에 실어야 한다는 제안이 청와대에서 받아들여지면서 범부처 연구개발(R&D) 예산을 배분·조정하는 기능을 맡는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신설됐고 조정력이 실제로 작동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R&D 예산의 '손발'은 과기부가 아닌 재정당국이 맡으면서 기재부가 여전히 '부처별 실링(상한)'을 선배정하는 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혁신본부장 자리에도 기재부 출신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재정 논리에 좌우되며 제도는 힘이 빠졌다. 2005년 황우석 사태와 국가과학기술위원회·창조경제 등으로 거버넌스가 흔들리며 일관성이 약해졌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과기부총리제는 폐지됐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내 과학기술혁신본부가 독자적 배분·조정의 실권을 얻지 못한다면 부총리제도의 실효성은 반쪽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과기부총리가 실질적으로 얼마나 예산을 조정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절차의 '속도'도 중요하다. 참여정부 시절 과기부총리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던 권재철 과학기술사업화진흥원 연구위원은 "상시 열리는 관계장관회의에서 안건을 정리하고 대통령 결심을 받아 곧바로 재정전략회의로 직행하는 패스트트랙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는 과기부에서 정책을 기획해도 기재부 심의, 국무회의, 예산 편성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우선순위가 뒤바뀌거나 예산이 삭감되는 경우가 많다. 패스트트랙이 마련되면 회의→대통령 결심→예산 반영이 단선 구조로 이어져, 기재부 단계에서 우선순위가 뒤집히는 일을 줄일 수 있다.
이와 함께 연중 발생하는 신흥기술·인재유치·인프라 병목에 신속 대응할 'R&D 예비비'를 항목화해 당해 집행→차년도 본예산 편입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구상도 논의된다. "올해 생긴 문제는 올해 시작해 풀자"는 발상이다.
하지만 권한을 뒷받침하기 위한 실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기정통부 고위관계자는 "민간은 이미 빠른 혁신 속도를 내지만 정부는 청사진 제시와 추진력이 약해졌다. 과기부가 국가 기술 청사진의 설계자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고 토로했다. 권 연구위원은 "국가 R&D 투자 규모는 100조원에 달하고, 이 중 70%가 민간에서 집행된다. 그러나 민간 연구개발 자금이 대학이나 출연연으로 흘러가는 구조는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 따르면 민간 기업 부설 연구소만 4만개에 달하지만 어떤 연구를 하는지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며 "부총리가 민간과 공공 연구 간 가교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AI 분야에서 과기부총리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 'AI 국가 전략'과 함께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조치들을 속도감있게 추진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첨단그래픽처리장치(GPU)를 수십만장 확보한다 해도 전력·냉각·클러스터 운영능력, 대학의 장비 조달 규정이 풀리지 않으면 제대로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천만원 이상 장비 구매에 까다로운 심의와 행정 절차가 걸려 연구실이 제때 장비를 들이지 못하는 현실도 병목이다. 데이터센터 전력 증설, 캠퍼스 DC 인프라 확충, 대형 연구장비 조달 규정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 비로소 하드웨어가 연구 생산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AI업계 관계자는 부총리 승격 자체가 즉각적인 변화를 보장하는 건 아니라면서도 "규제보다 진흥책이 많아야 하고 특히 인재 전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천인계획'처럼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이 어떤 인재를 필요로 하고, 어떻게 육성할지 큰 메시지를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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