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를 창설하며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이는 거의 반세기 동안 우리 선대 국가들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던 목표였습니다. 경제적 자유와 무역 자유화는 20세기에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왔으며, 21세기에는 기회의 폭을 넓혀줄 것입니다."(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1998년 WTO 장관회의서)
1995년 1월1일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를 만들기 위한 WTO 체제가 출범했다. WTO 출범 후 당시 미국을 이끌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를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단순한 WTO 창립 멤버가 아닌 '룰 메이커', 즉 핵심 설계자로 참여했고 '세계 경제 규범을 자국 주도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글로벌 자유무역 시스템을 주도했다. 하지만 출범한 지 30년이 지난 현재 WTO 체제는 '설계자'인 미국에 의해 '종식' 판결을 받았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언급한 대로 "WTO 중심 자유무역체제로 미국은 산업 일자리와 경제 안보의 상실로 시스템에 대한 대가를 치렀고, 다른 국가는 필요한 개혁을 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승자는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이재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 내부에서 다자무역체제, 즉 WTO가 더 이상 미국의 이익 수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졌다"며 "이는 단순히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만의 인식이 아니라 오래된 우려이고 이 같은 비판이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WTO의 전신인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가 전쟁을 부추겼다는 반성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무역 질서가 구축되면 경제 성장은 물론 전쟁 억제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세계 최대의 생산국이자 수출국으로서 자국 상품의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선 타국의 무역 장벽 철폐가 필요하다고 봤다.
1945년 국제통화기금(IMF)과 1946년 세계은행의 전신인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설립에 성공한 미국은 국제무역기구(ITO) 창설을 추진했다. 하지만 미 의회가 '과도한 국가 개입'이라며 비준을 거부하며 설립이 무산되자 이를 대신해 GATT가 체결됐다. 이후 우루과이라운드는 7년 이상의 협상 끝에 1994년 '마라케시 선언'을 공동 발표하며 WTO를 탄생시켰다. 당시 USTR은 "WTO의 핵심 회원국으로서 미국은 가입 협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며 "WTO 가입은 국제 무역 공동체를 확장하는 것 외에도 미국 상품과 서비스의 시장 접근성을 확대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미국의 기대는 현실이 됐다. WTO에 따르면 1994년 7조9110억달러 규모였던 전 세계 상품무역(수출+수입)은 2024년 49조1778억달러로 593.5% 급증했다. 미국 무역 규모도 같은 기간 1조2018억달러에서 5조4245억달러로 495.7% 늘었다. WTO가 보장한 자유무역체제에서 전 세계는 물론 미국도 수혜를 입은 셈이다.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무역 규범을 강화하는 데 WTO의 분쟁해결기구(DSB)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국은 당시 유럽공동체(EC)가 라틴아메리카산 바나나와 비교해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태평양 국가 기구, 즉 ACP 국가산 바나나에 관세 특혜 제공했다는 이유로 WTO에 제소했다. WTO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며 EC에 제도변경을 권고했다. 1997년엔 미국은 일본이 미국산 과일에 적용한 검역 조치가 과학적인 근거 없는 수입제한이라며 제소했고 미국이 승소함에 따라 일본은 조치를 철회했다.
WTO 체제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던 미국은 201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내적으론 제조업 기반이 무너졌고, 중국이 급속도로 성장하며 미국의 패권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정하늘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는 "WTO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 이유는 국내적 이유와 국제적 이유가 양존하고 있는데, 우선 미국 내 신자유주의에 대한 소외자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며 "국제적으론 WTO 체제가 중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중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즉 중국의 간접 보조금과 지식재산권(IP) 침탈을 WTO 협정이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은 WTO에 2001년 가입했다. 이후 중국 경제는 급성장했다. 정 대표는 "1990년대 중국은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6~13% 수준에 불과했고, 중국은 산업이 너무 낙후돼 경제적인 거인이 될 수는 없다고 봤었다"며 "하지만 IP 침해와 같은 것을 제외하더라도 중국의 잠재력은 엄청났는데 당시에는 미국이 이를 간과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각국이 WTO 운영을 위해 납부하는 분담금 규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분담금은 해당 국가의 직전 3년간의 국제 무역 규모를 전체 회원국의 총 무역 규모와 비교해 산정된다. 분담금 비율이 글로벌 무역에서 차지하는 규모인 셈이다. WTO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이 WTO에 가입한 지 3년 후인 2004년 분담금은 522만8175프랑(약 631만9500달러)으로 전체의 3.3%에 불과했다. 같은 해 미국의 분담금은 2525억9391만프랑(약 3053억249만달러)에 달했다. 전체 분담금의 15.8%가 미국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셈이다.
하지만 중국은 분담금은 점차 늘어 2019년에는 전체의 10%를 담당했고, 지난해엔 11.2%까지 높아졌다. 반면 미국은 2013년부터 11%대의 분담금을 내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WTO 회원국 중 가장 많은 분담금을 책정받고 있지만 지난해엔 내지 않았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WTO나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지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부터 WTO 분담금을 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국 정부 측은 WTO를 포함한 국제기구에 대한 검토를 진행 중인 상황으로 이 검토 결과에 따라 2024년과 올해 분담금 납부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WTO에 대한 미국의 불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입을 통해 노골적으로 표출돼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시절인 2018년 4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중국은 위대한 경제 강국이지만 WTO에서는 개발도상국으로 간주돼 미국에 비해 엄청난 특혜와 이점을 누리고 있다. WTO는 미국에 불공정하다"고 비난했다. 같은 해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선 "만약 그들이 개선하지 않는다면 나는 WTO에서 탈퇴할 것"이라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재임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2월 WTO를 포함한 모든 다자간 국제기구와 조약을 180일 이내에 검토하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그리어 대표의 WTO 체제 종식 선언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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