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쌓여 있는 금융 청구서…훼손되는 밸류업 성장

'생산적 금융' 외치는 정부, '밸류업' 무너뜨리는 역설
명분은 혁신·현실은 동원 '뒤엉킨 정책에 수익성 압박'
경제 생태계의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 전환 필요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그의 저서 '세계화와 그 불만(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서 정부나 국제기구가 시장에 개입할 때 자율성은 허용하지 않고 책임은 민간에 전가하는 방식이 시장의 신뢰를 훼손하고 장기적 성장을 해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지금 한국 금융권이 직면한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시비비]쌓여 있는 금융 청구서…훼손되는 밸류업 성장

정부는 최근 '생산적 금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금융사들이 예대 마진에만 의존하지 말고 혁신 산업에 자금을 공급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문했고, 금융당국은 벤처기업 투자와 모험자본 확대를 구체적 방향으로 제시했다. 이에 금융사들도 100조원 규모의 첨단·벤처펀드 조성, 소상공인 지원, 모험자본 확대 등에 협조하겠다고 응답했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정부 주도의 사실상 '정책 동원'에 가깝다는 점이다.

생산적 금융이란 단순히 부동산이나 소비성 대출이 아닌 경제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영역, 특히 벤처기업이나 혁신 스타트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담보력이 부족하고 수익 예측도 어려워 금융사 입장에서는 회수 가능성이 낮고 부실 위험이 큰 고위험 자산이다. 리스크는 크고 수익은 불확실하다. 이 구조에서 금융사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 금융사에 전달되는 '정책 청구서'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 장기 연체자 113만명의 채무를 최대 5000만원까지 탕감하는 '배드뱅크' 설립 비용 8000억원 중 절반은 금융사가 부담한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떠안는 또 다른 배드뱅크 구상도 추진 중이며, 금융권이 떠안을 부담은 최대 1조원에 이를 수 있다. 정책적 명분은 분명하지만, 정부 복지·구제 정책의 예산 보완재로 민간 금융이 반복적으로 동원되는 구조는 문제가 있다.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정책 청구서' 남발에 대한 불만이 금융권에서 터져 나오는 이유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는 금융사에 부과하는 교육세도 두 배 인상하기로 했다. 시중은행 등 60여개 금융사는 내년부터 1조3000억원의 추가 교육세를 부담하게 된다. 교육과 무관한 업종에 교육세를 부과하는 것은 조세 형평성은 물론 수익자 부담 원칙에도 어긋난다. 3년 연속 세수 부족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형 금융사를 대상으로 세수를 메우려는 조치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부담 구조는 금융사의 수익성과 건전성 모두를 압박한다. 수익은 줄고 리스크는 커지는 방식은 결국 금융 생태계를 약화시키고, 지속 가능한 혁신 자본 공급도 어렵게 만든다. 더 큰 모순은 정부가 동시에 '밸류업'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초부터 주주 이익 보호와 기업가치 제고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금융사의 현실은 현재 수익성은 압박받고 있고, 주가와 배당 여력은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 금융사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기조와 관치금융의 현실이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밸류업'은 단순한 주가 상승이 아니다. 예측 가능한 수익 구조, 자율적 경영 환경, 주주 환원 여건이 조화를 이뤄야 실현된다. 지금 금융권은 이 세 가지 모두를 놓칠 위기에 놓여 있다. 수익 기반이 무너지면 밸류업은커녕, 사회적 책임 수행조차 어렵다.


생산적 금융도 마찬가지다. 금융사가 스스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구조라면 그에 걸맞은 인센티브와 제도적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예컨대 바젤Ⅲ 도입 이후 강화된 건전성 규제는 금융사들의 위험 회피 성향을 키우며 모험자본 공급을 어렵게 해 왔다. 규제를 그대로 둔 채 "리스크를 감수하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핸들을 고정한 채 "속도를 내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금융당국은 기업·벤처투자에 금융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건전성 규제 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겠다는 의지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제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금융을 통제와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경제 생태계의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금융이 자율성과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밸류업도, 포용금융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자율성과 유연성이 없는 환경에서 희생만을 강요해서는 지속 가능한 금융 혁신은 불가능하다. 민간 자본이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넓히고, 시장 중심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금융이 제 역할을 다하고, 밸류업과 포용금융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이선애 경제금융부장 ls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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