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채널은 위기다. 스마트폰과 OTT에 계속 시청자를 빼앗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의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138분 1초다. 2019년보다 24분이나 줄었다. 70대를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감소 추세를 보였다. 특히 20대와 30대는 각각 62.5분과 53.5분이 감소했다.
프랑스 상황도 다르지 않다. 미디어 조사 기관 메디아메트리에 따르면 국민의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지난 10년간 매년 5~7분씩 감소했다. 특히 Z세대로 불리는 15~24세 800만 명 가운데 매일 텔레비전을 접한 비율은 지난 1월 54%에 불과했다. 전 연령 평균인 74%보다 20%가 낮았다. 파리 15구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는 김도원 씨는 "현지 젊은이들은 텔레비전 채널보다 OTT나 유튜브를 선호한다"고 했다.
Z세대는 텔레비전을 켜도 방송 채널을 거의 시청하지 않는다. 현지 최고 인기 채널인 TF1의 전체 평균 시청률이 20% 밑으로 떨어졌을 정도다. 10%대를 기록한 건 1987년 민영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다수 스포츠 경기 중계권을 확보하고도 반등에 실패했다.
위기를 감지한 레거시 미디어들은 다각도에서 타개책을 모색하고 있다. 그동안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공영 방송사인 텔레비지옹 그룹(4개 채널 운영)과 TF1 그룹(9개 채널 운영), M6 그룹(14개 채널 운영)이 공동 설립한 '살토'가 대표적 예다. 우리나라 웨이브처럼 '메이드 인 프랑스(made in France)'를 표방한 OTT다. 풍성한 자체 제작 콘텐츠로 넷플릭스에 대항했으나 지난해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패인은 구독자 확보 실패였다. 주류 방송사들의 콘텐츠를 모아서 볼 수 있다는 점 외에 내세울 이점이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오리지널 콘텐츠가 부족했고, 사업자 간 협력도 긴밀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프랑스 문화부가 집계한 OTT 시장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2년 6월 시장 점유율은 1.3%에 그쳤다. 넷플릭스는 60.1%로 압도적 선두였다.
자국 OTT 중에서는 프랑스 최초의 유료 채널 케이블에서 OTT로 진화한 카날+가 9.9%로 가장 앞섰다. 생존 비결은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확대와 타사와의 긴밀한 공조. 김문주 한국콘텐츠진흥원 프랑스비즈니스센터장은 "티빙과 파라마운트의 콘텐츠 공조처럼 디즈니+, 비인 스포츠, 애플TV+ 등과 공고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며 "인기 높은 콘텐츠로 Z세대 유치에 열을 올린다"고 전했다.
강력한 유인 동력 가운데 하나는 K-콘텐츠다. 시작 메뉴에 별도 코너까지 마련할 만큼 인기가 높다. 대표적 성공 사례로는 지난 7월 25일부터 방영된 애플TV+ '파친코'가 꼽힌다.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해 제작한 드라마다. 윤여정, 이민호, 김민아 등 한국 배우들이 주연했다.
현지 주간지 '텔레 셋 주르'는 "낭만적이고 미학적인 역사 프레스코화(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해 완성하는 회화)"라며 "진정한 걸작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호평했다.
현지 다른 방송사와 제작사들도 K-콘텐츠에 관심이 상당하다. 하나같이 Z세대를 끌어모을 동력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 4월 현지 영상 콘텐츠 마켓인 밉티비(MIPTV)에서 CJ ENM, KBS 미디어, SBS 콘텐츠허브 등 국내 기업들은 수출 상담 192건을 진행해 7295만 달러(약 997억9500만 원)의 실적을 냈다. 콘진원 관계자는 "CJ ENM 'LTNS', MBC '대학체전: 소년선수촌' 등 다수 콘텐츠가 바이어의 관심을 끌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 현지 드라마 쇼케이스 무대인 '시리즈 마니아'에선 CJ ENM '피라미드 게임'이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앤 마스다 파라마운트 글로벌 콘텐츠 디스트리뷰션 부사장은 "문화적 보편성이 관객들의 마음을 관통했다"며 "한국은 물론 글로벌 팬들에게도 인기 있는 작품이 되리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피라미드 게임'은 파라마운트+를 통해 5월 말부터 현지에서 방영돼 TV쇼 글로벌 부문 정상에 올랐다.
김 센터장은 "최근에도 넷플릭스 '하이라키'와 '더 에이트쇼', 아마존프라임의 '이재, 곧 죽습니다'와 '내 남편과 결혼해줘' 등이 프랑스 OTT 시청 순위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며 "Z세대를 비롯한 젊은 세대가 주요 시청층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지 대다수 방송 프로그램의 구성, 내용 등이 과거에 얽매여 있어 K-콘텐츠를 향한 관심은 더 커지리라 예상된다"고 말했다.
국제방송영상마켓(BCWW)에서 만난 마릴리즈 오제 카날+ 디지털 디렉터도 "많은 K-콘텐츠가 프랑스에서 호평받고 있다"며 "공급 폭을 점진적으로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카날+는 지난 7월 홍콩 통신회사 PCCW가 소유한 뷰(Viu)의 지분을 26.1%에서 36.8%로 확대했다. 뷰는 K-콘텐츠를 앞세워 동남아시아의 젊은 구독자들을 대거 끌어모은 OTT다. 국내 지상파·종편 드라마를 첫 방영 직후 송출해 일본, 대만, 베트남 등에서 큰 수익을 창출했다. 특히 '재벌집 막내아들'은 구독자 증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방송산업계는 카날+의 이런 움직임이 K-콘텐츠 투자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본다. 한 관계자는 "넷플릭스 등 미국 미디어 기업들의 확장세에 밀려 규제가 덜한 아시아 시장에서 미래 입지를 다지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K-콘텐츠의 가치를 유럽으로 이전시킬 가능성이 열려 국내 콘텐츠 제작 수요가 한층 커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른 관계자는 "K-콘텐츠 투자에 있어선 호재라고 할 만하다"면서도 "해외 OTT 의존도가 더 높아질 수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