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타그램] 오래된 사진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사람은 평생 보아 온 자기의 얼굴에서 스스로의 과거를 함께 본다.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보다는 힘들고 아팠던 과거일수록 더 절절히 보일 수 있다. 화해하고 놓아주지 못한 과거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도 가장 아끼는, 그러니까 가장 마음에 드는 옛날 사진 한 장 가져오시라 해서 그 사진을 들고 지금의 모습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몇 년 전 강원도 영월 폐광촌 어르신들 공동 자서전 제작 일을 도왔을 때 일이다.


영월 폐광촌 어르신들 사진과 글은 공동 자서전으로 만들어졌다.

영월 폐광촌 어르신들 사진과 글은 공동 자서전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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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웠던 시절 사진들에 애착이 가기 마련이다. 그런 사진을 가져오신 분들도 있었고 단 한 장을 고르기 어려워 서너 장 가져오신 분도 있었다. 아주 작게 찍혀 얼굴이 잘 분간 안 되는 사진이지만 내 인생 가장 즐겁고 만족스러웠던 시절 사진이라 이것을 들고 찍고 싶다는 분도 있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가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불러오는 것은 사람마다 가진 고유한 기억들이다. 누구와도 함께 말할 수 있는 공통의 기억과 누구도 대신 말해주지 않는 나만의 기억. 사진의 이야기는 사진 안에도 사진 밖에도 있다.

"50년이 더 된 사진이에요. 집에 세들어 살던 미군이 찍어줬어요. 처녀가 아이를 안고 있네, 이 아이는 조카에요. 옆은 우리 할머니. "

"50년이 더 된 사진이에요. 집에 세들어 살던 미군이 찍어줬어요. 처녀가 아이를 안고 있네, 이 아이는 조카에요. 옆은 우리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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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와 지금의 내가 함께 있는 사진을 손으로 만지고 보고 이야기했다. 사진 한 장에 쉽게 담겨버린 수십 년 시간에 대해, 그 시절 사진 한 장의 의미에 대해, 젊었던 시절의 설렘과 두려움에 대해, 지금은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나간 고통에 대해…. 보이는 것 뒤의 더 많은 이야기들이 불려 나왔다. 그러다 보니 사진은 또 관계를 만들어주고 과거를 현재에 포함시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꽃다운 시절은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 안에 있었다.


"처녀때 옆집 친구들이랑 쌀 한 말 값을 주고 찍었어. 맨 왼쪽이 나, 친구들은 약혼했는데 나만 못했었지."

"처녀때 옆집 친구들이랑 쌀 한 말 값을 주고 찍었어. 맨 왼쪽이 나, 친구들은 약혼했는데 나만 못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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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도 되기 전인데, 안경도 끼고 사내처럼 나왔네. 동네 동갑내기 남자애가 찍어줬는데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어디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스무 살도 되기 전인데, 안경도 끼고 사내처럼 나왔네. 동네 동갑내기 남자애가 찍어줬는데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어디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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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모습 속에는 지나간 시간과 과거의 일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손닿지 않는 먼 시간으로서의 과거, 좋았던 기억뿐 아니라 잊고 벗어나고 싶은 힘들었던 과거들이 모두 지금의 내 속에 있다. 인생에는 똑바로 바라보면서 해소되는 것들이 있다. 사진은 여러 기억들을 직접 대면하게 해준다. 오래된 사진을 손에 들고 찍은 사진 속 편한 웃음에는 지난 시간과 손잡고 화해할 수 있는 관용이 보였다. 잘 찍거나 잘 나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분들도 이제 잘 안다. 우리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모습과 가본 적 없는 장소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각자 따로 견뎌온 세월이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건너온 시간과 기억의 닮아 있음에 공감하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애할 때 복숭아 밭에 놀러 갔는데, 주인이 복숭아 달린 가지를 선물로 주길래 동네 오빠가 하는 사진관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얼마 안 있어 결혼했어요. 맏며느리가 되고 싶었는데 막내 며느리가 됐네..."

"연애할 때 복숭아 밭에 놀러 갔는데, 주인이 복숭아 달린 가지를 선물로 주길래 동네 오빠가 하는 사진관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얼마 안 있어 결혼했어요. 맏며느리가 되고 싶었는데 막내 며느리가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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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진을 보고 만지고 웃지만, 사진도 우리를 어루만져 준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별히 무슨 가르침을 주지 않아도 우리를 어루만지는 그 손은 우리 얼굴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닿아 위로해 주는 것이 있다.

편집자주사진과 보이는 것들, 지나간 시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씁니다. ‘언스타그램’은 즉각적(insta~)이지 않은(un~) 사진적(gram) 이야기를 뜻하는 조어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필자가 수년 전 강원도 영월군이 시행한 폐광촌 어르신들의 자서전 쓰기 프로젝트 ‘내 인생, 책 한 권을 낳았네’에 참여했던 이야기입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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