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R&D 예산 삭감, 尹정부 최대 실정 될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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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마구 벤다는 뜻을 담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전 정부의 실정을 개혁하는 것은 타당한 정책이지만,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조자룡의 헌 칼에 귀한 물건을 망치는 것과 같이 윤석열 정부의 최대 실정이 될 수 있다.


지난 9월6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R&D 예산은 정부 예산의 고질적인 이권 카르텔 문제로 부각됐다. 그 결과 내년도 연구개발 예산안은 올해 대비 5조2000억원(16.6%)이 삭감된 25조9000억원으로 편성됐다.

R&D 예산이 얼마나 조자룡 헌 칼 쓰듯 삭감됐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 즐비하게 드러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연구기관들의 ‘12대 국가전략기술’ 관련 내년 예산은 18.6%, 분야별로는 첨단로봇 34%, 이차전지 28%, 첨단모빌리티 27%, 반도체·디스플레이 26%, 차세대통신 24%씩 삭감됐다. 정부 출연연구기관 융합연구 과제의 경우, 과기부의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16건이 선정된 연구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융합연구단 예산은 24%, 창의형 융합연구는 48% 삭감됐다. 또 25개 과학기술 정부 출연연구기관에서는 약 1200명의 신진 연구자 감원이 불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공계 전문기술 인력 양성 예산은 81%가 삭감돼 교육훈련 예정 인원이 올해 1334명에서 내년에는 290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알려졌다.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불요불급한 재정지출은 한 푼이라도 줄여야 한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11일 국정감사에서 R&D 예산의 낡은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기 위해 예산 삭감이 불가피했다고 언급했다. 지난 33년간 삭감 없이 확대된 R&D 예산인 만큼 낡은 관행과 이권 카르텔에 의한 예산 누수와 비효율이 심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R&D 카르텔의 실체를 과학기술계와 국민들에게 밝히고 발본색원해야 한다. 이런 검증의 과정 없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과학기술계 전체가 낡은 관행과 비효율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집단으로 치부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지난 33년간 R&D 카르텔이 정부 예산을 낭비하고 있었다면 문제의 본질은 정부의 무능함에 있다. 과학기술 연구사업의 주제와 수행기관이 선정되기까지는 복잡한 심사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낡은 관행과 비효율이 심각하다면, 과기부는 그동안 무엇을 한 것일까. 정부의 역량이 바뀌지 않는데 예산 삭감만으로 낡은 관행과 비효율을 혁신할 수 있을까?

미국 벤처기업의 성공은 정부 예산 지원에 의한 기초 과학 연구성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미국 벤처기업들의 신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과학기술개발과 산업정책의 경쟁이 어느 때보다 중대한 국가 과제로 부각된 상황에서 정부 R&D 예산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D 예산 삭감이 이대로 진행된다면, 낡은 관행과 비효율은 일부 개선할 수 있을지라도 과학기술계에 사기 저하와 연구역량 저하 등 심각한 상처를 남길 것이며, 국민들에게는 윤석열 정부를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정부로 자리매김하는 대표적인 정책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동원 전 고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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