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정부 R&D 예산 삭감의 '파격과 졸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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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과 졸속'.


정부가 22일 발표한 내년도 주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안을 보면서 떠오르는 두 단어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이날 국회에 제출할 내년 과기정통부 소관 주요 R&D 예산안을 당초 24조9000억원에서 21조5000억원으로 3조4000억원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올해보다 13.9%나 삭감했다. 국가 R&D 예산은 '국가백년지대계'라는 명분 하에 꾸준히 늘어오기만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971억원(10.5%) 삭감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번이 역대 최대 규모다.

예산 외에 제도 개선안도 파격적이다. '가치를 공유하는' 해외 주요국 연구기관을 직접 국가 R&D에 참여시킨다. 첨예한 국익을 다투는 과학기술 R&D에 이념인 ‘동맹’이 등장했다. 도전적 연구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사라져가던 성과주의도 부활했다. 연구 수당 등 정부출연연구기관 예산을 10% 삭감하고, 부처별 R&D에서 매년 성과를 평가해 하위 20%를 구조조정하기로 했다.


이같은 파격적 행정에 대해 이 장관은 "이전 정부 시절 예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비효율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일부 R&D 현장에선 중요도ㆍ필요성에 관계없이 나눠먹기식 예산 따먹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28일 제기한 '카르텔' 문제는 표현상 다소 과도할지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다만 사상 최대 규모 삭감이라는 ‘파격’에 맞는 근거와 기준은 오리무중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만 있었을 뿐이다. 실제 국가 R&D 어느 부분에서 카르텔이 생겨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예산이 집행됐는지, 이를 어떻게 바로잡겠다는 건지 누구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과기정통부도 이날 “'카르텔적인 요소'가 있다"는 설명에 그쳤다. 2022년 3월 대선 후 1년 6개월여가 지나도록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대폭 삭감한 것에 대한 설명치고는 충분하지 않다. 과학기술이 가장 중요한 국가 발전 수단으로 떠오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으로 국가백년지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국제 과학기술 교류를 명분으로 '가치'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생뚱맞다. 미국ㆍ일본 등 우방이 모두 기술 제공을 거부했던 누리호를 생각해보자. 어느 나라도 안보ㆍ경제에 중요한 과학기술은 남과 쉽게 공유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식재산권(IP) 공동 활용 방법 등 세부적인 준비도 없이 발표됐다. 해외 교류 필요성을 촉구하는 연구 현장에서조차 졸속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성과주의 전면화는 자율ㆍ창조적 연구 성과에 지장을 줄 우려가 높다. 이공계 인재 부족ㆍ해외 유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출연연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수당까지 깎자고 나선 것도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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