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마음 저 들판, 길을 내고 걷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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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몹시 아프고 나서야 인생이 달라졌다. 모든 일을 그만두고 걷기만 했을 뿐인데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 보게 된 꽃, 풀, 나무, 하늘과 구름….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꼬박 같은 길을 다녀도 똑같은 길은 한 번도 없었다. 이쪽저쪽 저절로 걷기 좋은 길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인생을 대하는 마음도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게 저자의 고백이다. <마음 저 들판, 길을 내고 걷다>는 심영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가 걸으면서 만난 자연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여기에 삶의 단편을 더해 써 내려간 글이다. 유튜브 채널(중민세상, https://www.youtube.com/@joongmin_ibc)에서 낭독 영상도 감상할 수 있다. 글자 수 100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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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되면서 서래섬보다 미루나무 길에 가는 날이 더 많아졌다. 미루나무 길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역광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전에는 미루나무 길을 먼저 갔다가 그라스정원 쪽으로 돌아 나와 집으로 왔는데 이제는 그라스정원부터 갔다가 오는 코스다.


해를 등에 지고 그라스정원을 나와 걷는다. 코스모스 길을 지나 미루나무 길로 들어서면 그 즉시 강물 위아래로 펼쳐지는 눈부신 태양빛에 마주치게 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오, 오!" 하고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강물 위에 떠 있는 태양은 무언가 압도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황홀함과 숙연함 이상의 감동이다. 나의 모든 감각은 일순 정지되고 만다.

잠시, 그 감동의 마취가 풀리면 그때부터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다. 멀리 있는 다리를 배경으로 하늘과 한강을 이등분하고, 하늘에 있는 커다란 태양과 강물에 반사된 햇빛을 찍으면 그것 자체만으로 멋진 작품이 되었다. 요즘 말로 막 찍어도 화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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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빨리 떨어지면서 사진의 색깔도 더 붉게 변한다. 마치 하늘이 불타는 것 같이 보인다. 실시간으로 그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더니 한 친구가 영국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터너의 전시회에서 바다 위로 불타는 석양을 그린 그림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강물 위의 석양만큼이나 미루나무 사이로 비치는 석양도 아름답다. 나는 모네의 그림을 본떠서 세 그루, 네 그루 미루나무 사이에 태양을 넣고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는 여교수들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더니 내가 아픈 동안 사진작가가 다 된 것 같다고 했다.


10월 중순쯤 되니 일몰 시각이 점점 빨라져 5시 반이 되면 해가 지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던 해가 떨어지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이쪽에서 사진을 찍고, 얼른 다음 장소로 이동해서 찍고, 재빨리 다음 장소로 가서 찍고는 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그리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다 보면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심영희, <마음 저 들판, 길을 내고 걷다>, 중민출판사, 1만5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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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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