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러시아 석유를 싣는 '그림자선단'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가장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는 곳이 국제 석유시장이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가격상한제가 실시되고 대러 제재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석유 유통체계가 완전히 변화했기 때문이다.


기존 러시아산 석유의 유통 과정은 단순했다. 전 유럽에 걸쳐 연결된 20여개의 송유관을 통해 유럽 각국의 주문량에 따라 그대로 석유나 정제유를 쏴줬다. 정제유 중 일부만이 미국이나 중국, 인도 등에 유조선으로 운반돼 판매됐다.

그러나 대러 제재 장기화로 러시아산 석유의 유통 과정은 매우 복잡해졌다. 유럽으로의 직결 송유관이 사실상 폐쇄되면서 수출 물량 대부분은 중국과 인도로 향하게 됐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기존보다 4배 이상 많은 유조선을 필요로 하게 됐지만, 대러 제재로 유조선 주문 역시 어려워진 상황이다.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인 로스네프트의 석유 제품 모습.[이미지출처=로스네프트 홈페이지]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인 로스네프트의 석유 제품 모습.[이미지출처=로스네프트 홈페이지]

원본보기 아이콘

이때 러시아의 석유를 운반해주겠다고 나타난 것이 일명 ‘그림자 선단(Shadow Fleet)’이다. 글자 그대로 국적도, 배의 실소유주와 운영진도 알 수 없는, 모든 게 베일에 둘러싸인 밀수 전문 선박을 의미한다. 이들은 페르시아만에서 이란산 석유를, 카리브해에서 베네수엘라산 석유를 밀수하던 베테랑들이다.

석유 밀수 전문선단인 이들은 선박 위치추적기를 꺼버리거나, 배의 국적을 세탁하거나, 공해상에서 석유를 맞바꾸는 수법 등을 동원해 러시아산 석유를 각국에 판매하고 있다. 유조선 확보가 어려운 러시아 역시 비중이 커진 대중, 대인도 수출 물량의 대부분을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난해 12월5일부터 유럽연합(EU)에서 러시아산 석유에 대한 금수조치가 시작됐음에도 여전히 러시아산 석유의 30%가량은 유럽 국가들이 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에 막대한 밀수 수입을 거둔 그림자 선단이 그 규모를 점차 키워가면서 전쟁 전 세계 2위 규모이던 러시아산 석유 수출의 대부분을 떠맡게 된 것이다.


기존 정식 해상 교역로에 밀수 선단이 판을 치면서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러 제재에 구멍이 뚫리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교역로의 안전과 함께 해상사고 위험도도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림자 선단의 배들은 위치추적을 막기 위해 통신선도 차단해버리는 경우가 많아 해상에서 조난당하면 제대로 대처하기가 어렵다. 많은 선적료를 챙기고자 무리하게 석유를 과적하고 다니다가 전복사고라도 발생하면 해당 수역의 해양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될 위험도 안고 있다.


또한 그림자 선단은 배후에 각국의 해적이나 테러조직 등 군사조직들이 끼어 있어 선적 경쟁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무력충돌이 발생할 위험도 높아진다. 소말리아 아덴만과 같이 해적들의 활동지역이 크게 늘어날 경우에는 각국의 생명줄과 같은 해상 무역로가 위협을 받게 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또다시 국제 연합군이 구성돼 막대한 재원이 소요될 우려도 있다.


특히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이고 일부 바다에서 해상영유권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더욱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북한 지역의 공해 일대 또한 전 세계 그림자 선단이 암약하는 주요 해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단속하기 위한 감시능력의 강화와 주변국과의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