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재벌,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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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들 무렵 내가 삼성을 물려받을 아이란 걸 알았습니다. 우리 아이는 달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과 같이 차 한잔을 마실 때 들은 이야기다. 정말인가 되물었다. "물려줄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창업 1세대가 2세대에게 물려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3세대, 4세대에게 물려주려면 무리해야 해요. 거기 쓸 시간, 노력, 돈이 있다면 회사 발전을 위해 쓰겠습니다." 기사는 쓰지 못했다. 비보도 전제 미팅, 쉽게 말해 들은 내용을 기사로 쓰지 않기로 한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2020년 이 회장은 기자들을 불러 모은 뒤 "경영권 승계 논란을 끝내겠다"며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삼성을 물려받을 아이는 행복하지 않았나 보다. 이 회장은 중고등학교 시절 삼성 직원들 손을 잡고 전국에 있는 삼성 사업장을 돌았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쟤가 그 아이’라며 수군거렸다. 그 삶이 행복했다면 내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결심할 리가 없다. 한국 최고 기업집단 총수가 아이 사랑을 표현한 방법은 그 자리를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는 것이다.

"아이 손톱 밑이 까만색이에요. 사진 나가면 경호원 붙여야 합니다."


2011년 일본 상장 직후 넥슨 김정주 창업자가 곁에 서 있는 딸을 보면서 한 말이다. 인터뷰를 안 하기로 유명했던 김 창업자를 무작정 찾아가서 3시간 정도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사진도 찍었다. 신문에 인터뷰를 쓰고 싶다, 안된다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마지못해 인터뷰를 허락한 그는 딱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다. "아이 사진은 나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당시 김 창업자 가족은 제주도에 살고 있었다. 아이가 매일 학교 운동장에서 흙장난을 치면서 놀았다. 주변에선 아이가 한국 최고 부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사람의 딸이란 걸 줄 몰랐다. 매일 손톱 아래 흙이 잔뜩 낀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그게 아버지의 자랑이고 사랑이었다. 사진이 나가면 아이는 자유롭게 뛰놀 권리를 빼앗길 것이란 이야기였다. 김정주 창업자의 딸 사랑 방식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꼭꼭 숨겨 놓고 아이가 자유를 만끽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김 창업자가 세상을 뜬 다음에도 그의 의지는 변치 않고 남아 아이를 지키고 있다. 얼마 전 김 창업자의 두 딸이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최연소 억만장자라는 뉴스가 신문과 TV에 떴다. 하지만 뉴스에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창업자의 유지를 생각한 회사에서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자녀 사랑 표현법이 극단적으로 다른 기업 총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오뚜기 함영준 회장 부녀다. 딸이 뮤지컬 배우이자 유튜버다. 부녀는 가끔 같이 찍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도 한다. 딸을 보는 함 회장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남들도 내 딸을 봐주기를 바란다.

모든 부모 마음은 비슷하다. 아이가 잘 크기를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랑을 보여주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어떤 방식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터넷을 보고 있으면 가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댓글 등이 올라온다. 부모 자식 간의 일은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면 어떨까 싶다.


백강녕 산업IT부 부장




백강녕 young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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