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기업, 해외에 묻은 돈 120兆…국내소득만 세금 걷어라"

유보금은 물론 R&D·고용 모두 해외로 빠져
국내 소득만 과세 '원천지주의' 도입 후
해외유보금 환류율…日 95.4%, 美 77%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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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문채석 기자]


#영국 본사가 아일랜드 자회사에서 벌어들인 5000억원을 모두 본국에 보내면 아일랜드 납부액 625억원을 내고 4375억원의 세후이익을 챙길 수 있지만, 한국 본사는 한국 납부액 625억원까지 물고 3750억원만 가져갈 수 있다. 아일랜드에서 번 돈 만큼의 세금을 한국 본토에서도 내야 하는 해묵은 '거주지주의' 과세 체계 때문이다.

거주지주의 체제 때문에 국내 기업이 해외에 묻어둔 유보금이 약 120여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국적기업의 국외 발생 소득까지 세금으로 걷는 현 '거주지주의' 과세 체계를 국내 소득만 과세하는 '원천지주의'로 조속히 바꿔 해외로 빠져나가는 한국 기업의 자금과 연구개발(R&D), 고용 등 국내환류를 유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9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원천지주의 과세로 전환해야 하는 6가지 이유'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정부가 발표한 올해 세법개정안에 다국적기업의 배당소득에 대한 원천지주의 도입 내용이 담겨 있는데, 시행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6개국만 도입 중인 '거주지주의' 체계에선 해외 발생 소득은 물론 국내 발생 소득에 대한 세금도 내야 한다. 외국에서 낸 세액을 일부 공제해줄 뿐이다. 반대로 미국, 일본 등 OECD 가입국 대부분이 채택 중인 원천지주의에선 해외소득 중 사업 및 배당소득 과세를 면제해준다. 나라 밖에서 번 돈에 대해선 사실상 세금을 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직도 거주지주의를 적용 중인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기준으로 한국을 비롯해 아일랜드, 멕시코, 칠레, 콜롬비아, 이스라엘 등 6개국뿐이다. 미국, 일본 등 20개국은 원천지주의를 도입했다.


세법개정안엔 국내 모회사가 배당기준일의 6개월 이상 해외 자회사 지분율 10% 이상(해외자원개발사업 해외 자회사의 경우 5%)을 보유한 경우 해외 자회사가 내국법인에 지급한 배당금액의 95%에 대해 익금불산입을 허용하는 방식이다. 익금불산입은 회계상 명백히 법인의 순자산을 늘리는 '익금'이지만, 법인세법상 과세 소득 산출에선 '익금'에 산입하지 않는 행위를 뜻한다.


국제수지 중 해외유보잉여금 추이.(자료=한경연)

국제수지 중 해외유보잉여금 추이.(자료=한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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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연에 따르면 거주지주의를 의식한 한국 다국적기업의 해외유보금이 지난해 기준 902억달러(약 121조원)에 달한다. 해외 자회사 보유잉여금은 작년 한 해에만 104억3000만달러(약 14조원) 증가했다. 거주지주의 때문에 기업이 절세 전략을 짜는 데 별도의 비용을 들여야 하는 것은 물론 해외에 묶어둔 자금은 '해외에서만' 투자돼야 해 투자 의사결정이 왜곡되는 비효율적인 경영을 감수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임동원 한경연 연구위원은 "해외유보금이 느는 주요 원인은 해외에서 번 소득을 본국에 송금하면 본국에서도 과세해야 하는 거주지주의 때문"이라며 "거주지주의 과세는 기업의 국외원천소득을 국내로 환류시키지 않는 '잠금효과'를 발생시키는데, 원천지주의 과세 체계로 바꾸면 해외유보금의 국내환류가 촉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미국 등은 거주지주의를 원천지주의로 바꾼 효과를 톡톡히 본 것으로 조사됐다. 한경연에 따르면 일본은 2009년 원천지주의 도입 이듬해 해외유보금 국내환류비율이 95.4%까지 올랐다. 미국도 원천지주의 채택 후 해외유보금의 약 77%를 국내로 빨아들였다.


원천지주의로 바꾸면 한국 기업의 해외유보금뿐 아니라 해외 기업의 국내 투자를 유치하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다국적기업은 본사가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세계 각국에 자회사를 설립하는 만큼 각국 세제에 따른 추가 과세 여부에 민감하다. 요즘처럼 세계의 공급망 재편과 탈(脫) 중국화 속도가 높은 상황에선 원천지주의 과세가 투자 유치의 해법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경연에 따르면 한국기업(내국인)이 해외에 하는 직접투자(ODI)는 608억2000만달러(약 81조5000억원)나 되지만 외국인이 한국에 하는 직접투자(FDI)는 168억2000만달러(약 22조5000억원)에 불과하다. ODI 규모는 FDI의 3.6배나 된다. 임 위원은 "902억달러의 해외유보금 중 절반만 국내로 환류돼도 효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했다.


거주지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국제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2011년 대비 법인세 최고세율을 높인 나라는 한국 등 6개국뿐이다. 이 기간 한국은 22%에서 25%로 3%포인트 올렸다. 그 결과 OECD 가입 37개국 중 한국의 조세 국제경쟁력지수는 2017년 17위에서 올해 26위로 9단계나 떨어졌다. 임 위원은 "국내 투자기업의 조세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해외소득 과세를 면제하는 원천지주의 과세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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