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이제 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게 가장 큰 변화에요"
[아시아경제 이은주 기자] 드라마 출연 이후 가장 큰 변화를 묻는 질문에 정은혜 작가는 사람들의 시선 변화를 꼽았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해 화제가 된 정 작가는 드라마 역할처럼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정 작가의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는 "은혜씨는 그대로인데, 은혜씨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빛이 너무나 달라졌다"며 "그것이 정말로 ‘살맛’이 난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는 지난달 26일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정은혜 작가를 만났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성인 여성 장애인인 그는 배우, 캐리커쳐 작가, 화가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예술 세계를 세상에 보여주고 있다. 토포하우스에서는 지난달 24일부터 30일까지 그의 개인전 ‘포옹전’이 열렸다. 그가 직접 만난 사람들과의 따뜻한 포옹의 순간들을 담아 전시했다. 편견 어린 세상에 유쾌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은 매순간 누적된 다정함이라는 메시지들이 작품 곳곳에 녹아 있었다.
정 작가는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옥(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영희역으로 출연해 큰 인기를 모았다. 드라마 역할과 같이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그는, 여성 장애인의 삶을 그대로 연기해 대중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세상이 성인 여성 장애인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서 바라보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줬고, 차별 어린 시선 속에서도 세상에 등 돌리지 않는 건강한 삶의 자세를 보여줬다.
그는 취재진들을 향해 “그림을 그려주고 싶다”고 밝게 말을 걸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줬고, 끊임없는 농담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정 작가에게도 장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쉽지 않은 시간들이 있었다. 그는 한때 “나는 왜이렇게 다른 걸까” “나는 왜 남들과 다를까”를 되뇌면서 자기 혐오에 시달렸다. 초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그는 매일 하교한 후 시를 썼다. “죽고 싶다. 쉬고 싶다”는 말을 시로 되뇠다.
결국 정 작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대안학교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대안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성인이 된 뒤까지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결국 대안학교도 자체적인 조기졸업을 하기로 했다. 그는 ‘무학력’이 됐다. 정 작가의 아버지 서동일 영화감독은 “성인이 되어서도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었던 은혜씨는 ‘상상의 친구들’을 만들었다. 상상의 친구들을 만들어 소리를 지르고, 욕도 하고, 싸우고 울고 했다”고 말했다. 혼자만의 상상으로 새벽녘마다 친구를 만들어 고함을 쳤다. 고립에 대한 슬픔이 계속 쌓였다.
거리에 나설 때마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은 정 작가를 더욱 움츠리게했다. 서 감독은 “(유명해지기 전까지) 사람들이 은혜씨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외모, 말투, 행동에 대해 이상하고, 낯설며, 선뜻 다가설 수 없는 존재로 은혜씨를 취급했다”고 회상했다. 사회적 관계를 맺고 싶지만 돌아오는 차가운 시선들에 은헤씨에겐 여러 마음의 병들이 생겼다. 말을 더듬게 됐다. 조현병 증상도 나타났다.
그런 은혜씨 삶의 전환점이 된 것은 ‘미술’이었다. 어머니인 장차현실 작가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사회와 소통하게 되면서였다. 서 감독은 “어느날 은혜씨가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따라그리는데 예사롭지 않은 감각을 확인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문호리 리버마켓’이라는 플리마켓을 통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도록 했다. 셀러로 참여해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충분한 돈이 벌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은혜씨는 매일매일 그렸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벌판 같은 공간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이야기하는 경험들이 누적되면서 정 작가는 비로소 ‘사회인’이 됐다. 매주 주말마다 열리는 마켓, 오전 10시부터 밤 8시까지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다. 주문을 받고 그림을 그리면서 사람들과 소통을 하면서 우울감이 해소됐다. 조현병 증상은 완화됐다. 정 작가는 “저를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드라마 방영 이후에는 정 작가를 향한 존중의 시선이 좀 더 커졌다. 많은 사람들이 정 작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정 작가는 우울감에서 더욱 멀어졌다. 정작가와 장차현실 작가 모두 드라마 방영 이후 "살맛 난다"고 입을 모았다. 정 작가는 "사람들이 저를 사랑스러운 눈빛과 표정으로 봐주기 시작했고, 그것이 기분 좋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장차현실 작가 또한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됐다. 은혜씨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너무나 달라져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과거의 편견이나 상처를 파고들기보다, 현재 사람들이 그에게 건네는 다정함을 마음에 깊이 담는 편이다. 그런 정 작가의 태도는 작품 곳곳에 담겨있다. 2021년부터 2022년에 걸쳐 틈틈이 작업해 전시한 ‘포옹전’에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과 따뜻함이 가득하다. 장차현실 작가는 "2016년부터 그림 작업을 해온 은혜씨의 화두를 쭉 살펴보면 언제나 ‘사람’이었다"며 "사람들을 끌어안으면서 본인이 건강해지고, 마음의 어려움을 치유하는 과정이 담겨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정 작가에게는 유별난 인정욕구도 없다. 그저 오늘, 이 순간을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장차현실 작가는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조차 다음에는 더 잘그리고 싶다는 목표 달성의 과정으로 생각하거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을 담는다"며 "그러나 은혜씨에겐 그런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그림 그리는 순간 피사체에 대해 몰입하고 집중할 뿐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혜씨는 오늘을 행복하게 산다. 이런 은혜씨의 삶을 보면 편안해지고 가벼워진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인터뷰 내내 취재진의 얼굴들을 그려주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지금 제게 중요한 분들이니까 꼭 그려드리고 싶다"고 웃었다. 농담을 편하게 건넸다. 인터뷰 내내 자신을 향했던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들을 잊지 않고 행복해했고, 다시 되새기기도 했다. 특히 그는 드라마 출연을 제의한 노희경 작가가 보여준 애정을 잊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노희경 작가를 담은 작품을 가장 아끼기도 한다. 정 작가는 "노 작가는 마음씨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이다"라며 "노 작가는 (체구가) 작은 인물이지만, 커다란 캔버스에 팬과 아크릴로 그의 큰 모습을 그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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