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민우 기자, 심나영 기자] #수원에 사는 직장인 박세영(35·가명)씨는 최근 예금 만기로 수령한 현금 1억원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3~4%대의 높은 금리를 주는 특판 예금 상품 출시가 줄 잇고 있지만 기준금리가 줄곧 오르고 있어서다. 일찍 예금상품에 가입하자니 금리 인상기에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쥐고 있자니 시간만 흐르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다. 결국 박씨는 2000만원은 금리 3.6%의 1년 만기 특판 저축상품에, 나머지 8000만원은 각기 2.2%, 2.0%의 수시입출금식통장(파킹통장)에 넣고 3개월 후를 기약하기로 했다.
'금리 노마드족'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은행 예·적금 금리는 꾸준히 오르는 반면, 자산시장은 붕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13일 기준금리를 0.5%포인트(p) 올리는 '빅스텝'을 밟은 이후 예·적금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투자의 3대 요소는 수익성, 안전성, 환금성으로, 주식·가상자산 시장이 고점 대비 각기 30~80%씩 하락한 상황에서 최근 예·적금 흐름은 이런 3대 요소에 부합한다"면서 "미국이 물가상승률을 2%대로 잡기 위해 당분간 금리인상을 꾸준히 시도할 예정이어서 최소 연말, 길게는 내년까지 예·적금 선호현상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밝혔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예·적금 잔액은 올해 상반기에만 21조2341억원 증가했다. 특히 올해 1월과 4월, 5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0.25%p씩 인상시킬 때마다 5대 시중은행의 예·적금 잔액이 껑충 뛰었다.
전달 대비 증가분은 지난 5월이 19조9375억원, 1월은 11조2895억원을 기록했다. 금통위가 열렸음에도 기준금리가 동결된 지난 2월과 금통위가 안 열린 3월에는 각각 5952억원, 6조910억원 예·적금 잔액이 줄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금리가 오르는 시기에 맞춰 은행 수신상품에 자금이 몰린 셈이다. 지방은행은 물론 저축은행과 새마을금고 등 제2금융권이 더욱 적극적으로 고금리 수신상품을 내놓는 경향을 감안하면 예·적금에 몰린 자금은 더욱 클 것으로 예측된다.
실제로 예·적금 금리는 1년전에 비해 1%p 이상 상승했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예금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는 1.95%, 정기적금 금리는 2.06% 수준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각각 0.82%, 1.14%였다.
증시가 부진한 것도 예·적금 '머니무브'를 부추겼다. 지난해 3300대까지 올랐던 코스피 지수는 지난 6일 2292.01까지 떨어지며 종가 기준 연 최저점을 기록했다. 투자심리도 식었다. 주식 매수 대기자금 격인 고객예탁금 잔고는 지난 8일 기준 54조4140억원을 기록해 올해 1월 27일 연 최고치와 비교하면 20조6930억원 감소했다. 5대 시중은행의 예·적금 잔액이 올해 상반기 21조2341억원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증시에서 은행으로 대규모 머니무브가 일어난 셈이다.
특판상품이 완판 행진을 이어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 5% 금리를 제공하는 케이뱅크의 '코드K 자유적금'은 지난달 출시 열흘만에 동이 났다. 연 최고 3.2% 금리인 우리은행의 '2022 우리 특판 정기예금'도 출시 6일 만에 한도가 소진됐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0.5%p 추가 인상한만큼 향후 예·적금 상품 금리 상승을 노린 자금이 더욱 몰릴 것으로 전망된다.
소재용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경기 하강에 대한 우려감 높아지고 있으나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우선 주력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며 "한은이 올해 기준금리를 2.75~3.00%선까지 올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빅스텝 이후에도 한은의 추가금리 인상에 대한 예상이 일면서 '머니무브 대기족'들도 늘어나고 있다. 직장인 김민성(41,가명)씨도 시간 날 때마다 2금융권 특판 적금 기사를 찾아보고 있다. 올해 초 가지고 있던 자금을 미국 S&P500 추종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했다가 이달까지 하락률이 8.05%였다. 그러던 참에 회사동료가 저축은행에서 연 5% 금리 적금을 들었다는 이야기에 솔깃했다. 저축은행에 적금 가입 상담을 하러 찾아갔다가 "7월 중순 이후에 더 좋은 조건의 적금 상품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은행원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출시하면 연락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김씨는 "요즘 친구들 단톡방에서도 금리가 높은 예·적금 상품 정보를 주고받는다"고 소개했다.
한은이 빅스텝을 밟자마자 시중은행들은 발 빠르게 이를 반영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오는 14일부터 예·적금 상품 30종(예금 8종, 적금 22종)의 기본 금리를 최대 0.9%p 인상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주택청약종합저축과 동시에 가입하면 만기에 2배의 금리를 적용 받는 ‘내집마련 더블업 적금’의 경우 1년 만기 금리가 최고 연 5.5%가 됐다. 우리은행도 이날 21개 정기예금과 25개 적금금리를 최대 0.8%p까지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3%대 예금, 4%대 적금 상품군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장기보단 단기상품에 가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김학수 하나은행 압구정PB센터 팀장은 "최근 자산가들을 보면 1개월, 3개월 단위의 초단기 예금을 들거나, 외화를 기존에 사둔 경우 외화정기예금도 초단기로 가입한다"면서 "이처럼 예금주기를 짧게 가져가는 것이 좋고, 이외엔 최근 3개월, 4개월 단기채들도 금리수준이 연 4% 안팎에 이르는 만큼 투자를 고려해 봄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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