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신에 멈추지 말고 헌신하라"…1세대 인권변호사 한승헌 전 감사원장 별세(종합)

군사정권 시절 수많은 양심수와 시국 사범을 변호하며 '1세대 인권변호사'로 불렸던 한승헌 변호사(88)가 20일 별세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군사정권 시절 수많은 양심수와 시국 사범을 변호하며 '1세대 인권변호사'로 불렸던 한승헌 변호사(88)가 20일 별세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입신에 멈추지 말고 헌신합시다.”

20일 타계한 1세대 인권변호사 한승헌 전 감사원장(88)은 생전 여러 강연에서 이 말을 빼놓지 않았다.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출세의 길, 입신의 길로 통한다. “법조인들이 자기 개인의 편안함, 개인의 영화로움을 거기서 멈추지 말고 정말 세상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고인은 2018년에 낸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책에서는 “적어도 법조 전문직이자 최고의 지성임을 자부하는 법조인이라면, 권력자의 이익과 국민의 이익이 맞섰을 경우에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법조인은 단순한 법률 기술자 또는 기능공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보편적 가치를 사고의 기준으로 삼고 이를 추구하는 지성인이어야 한다. 의를 위해서는 고난도 무릅쓰고, 손해도 감수하는 사람, 개인적으로는 피할 수도 있는 위험 앞에서 비켜서지 않는, 그런 법조인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정권을 잡은 집권세력을 향해선 “법치주의가 하향적 지배 아닌 상향적 권력 견제장치임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집권자는 국민에 대한 준법 훈시가 법치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인은 2019년 서울지방변호사회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인권변호사라는 명칭에 대해 “변호사법 제1조에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변호사의 사명으로 규정해 놓았으니까 변호사가 그런 사명수행에 충실한 것은 당연하다. 공 잘차는 축구선구, 헤엄 잘 치는 수영선수같이 부자연스럽다”고 했다. 인권변호사라는 부류와 그러한 호칭이 붙지 않는 변호사 사이에 자칫하면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고도 했다.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변론… 민변 전신 '정법회' 결성

고인은 1934년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나 전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8회)에 합격했고 군사정권인 1965년 인권변호 활동을 시작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1967), ‘민청학련 사건’(1974), ‘인혁당 사건’(1975),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1980),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2004) 등 여러 시국사건을 맡았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당시 공범으로 지목돼 투옥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홍성우 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등 인권변호의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민주화실천변호사모임의 모태가 된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다. 정법회와 청년변호사회(청변)가 통합한 민변은 1988년 5월28일 51명의 회원으로 출범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땐 사법제도 개혁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대리인단에 소속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절에는 선거 캠프 통합정부 자문위 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기자협회 법률고문과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관훈클럽 고문변호사 등을 거쳤다.


80대의 고령에도 사회 전반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에 고인은 "정부가 선장의 안전 점검 책임을 면제한 것 같은 규제 완화가 이번 사태를 유발한 원인"이라며 "모든 참사의 배경엔 개인과 집단의 탐욕과 부패가 있다"고 비판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엔 "법원이 반성하고, 당당한 사법부로 나아가는 방향을 국민에게 제시를 해야 한다"며 "법원이 이 바람만 좀 잠잠할 정도로 넘어가면 또 괜찮지 않나 생각하는 것 같다"고 질책했다.


시집과 에세이집 등 다양한 저술도 남겼다. 검사로 일하던 1961년 첫 시집 '인간귀향'을 냈고 변호사 시절 1967년 시집 '노숙'을 출간했다. 2016년엔 시집 '하얀 목소리'를 냈다. "변호사에겐 역사의 기록자로서도 책무가 있다"던 고인은 2009년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을, 2013년 '피고인이 된 변호사'를 발표했다.


2018년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신하고 사법개혁과 사법부의 탈권위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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