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300조 퇴직연금의 사각지대

[아시아경제 전필수 기자] 퇴직연금 적립금이 300조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지난해 말 295조6000억원이었으니 지금은 300조원을 넘었을 것이다. 지난해 늘어난 퇴직연금 규모가 40조1000억원이었다. 연기금으로는 올 1월 900조원을 넘긴 국민연금 다음으로 많은 규모인데 2040년이면 국민연금 규모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퇴직연금제도는 회사가 지급해야 할 퇴직금을 회사가 아닌 금융회사에 맡기고, 회사나 근로자의 지시에 따라 운용해 근로자의 퇴직 시 일시금 또는 연금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쉽게 말해 회사가 도산하더라도 퇴직금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2015년 12월 시작됐는데 근로자 입장에서 퇴직금 떼일 일이 없어지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제도인 셈이고, 정부에서도 적극 가입을 권유하다보니 불과 6년여만에 300조원짜리 매머드급 규모가 됐다.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수익률(2021년 기준 2%)이 문제이긴 하지만 수익률이 높은 실적배당형 비율이 늘어나고 있어 이 부분도 점차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기준 실적배당형의 수익률은 6.42%, 원리금보장형은 1.35%였는데, 전체 적립금 중 86.4%가 원리금보장형이었다.


진짜 문제는 이 제도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30인 이하 회사의 근로자 대다수가 아직 퇴직연금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기준 30인 이하 사업장의 퇴직연금 가입률은 24%에 불과했다. 반면 30인 이상 299인 이하 사업장의 가입률은 77.9%, 300인 이상 사업장은 90.8%였다.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퇴직연금 가입률이 낮은 이유는 명확하다. 자금 여유가 없어서다. 달리 말하면 퇴직금을 제때 정산해 주지 못할 확률도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퇴직금의 안정적 수급이라는 제도의 취지를 생각한다면 우선적으로 3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퇴직연금 가입을 유도했어야 했다.

뒤늦게나마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이 중소기업퇴직연기금 발대식(14일)을 갖고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3년간 소규모 기업 근로자 중 월평균 보수 230만원 미만 근로자의 사용자부담금 10%를 재정지원하고, 최저수준의 수수료(0.2% 이하)를 책정해주기로 했다. 이를 통해 10년 후에는 30인 미만 사업장의 퇴직연금 가입률을 44%까지 올린다는 복안이다.


이마저 쉬운 목표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한국은 노인빈곤율이 40.4%(2020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OECD 평균은 13.1%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근로자 대댜수는 중소기업 소속이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근로자 1874만여명 중 30인 이하 사업장 근로자는 1044만여명으로 전체의 56%다. 300인 이하로 범위를 확대하면 전체 근로자의 85%가 중소기업 종사자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에 퇴직연금 제도에서조차 불이익을 받는 이들이 절대 다수다보니 은퇴 후 가난한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영국의 경우 퇴직연금 주무부처가 연금노동부다. 차관급 인사가 퇴직연금을 담당한다. 한국의 퇴직연금 주무부서는 고용노동부의 퇴직연금복지과다. ‘실’이나 ‘국’도 아닌 ‘과’ 하나가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더 강력한 지원책과 강제력이 필요하다. 돈 낸 만큼 받아가는 게 공정하다는 시장논리로는 빈곤한 노년 한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양극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선 안 된다.




전필수 기자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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