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베이징=조영신 특파원] 중국 베이징 자금성 인근에 둥자오민샹(동교민항)이라 불리는 거리가 있다.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다. 1㎞가 조금 넘는 이 거리에는 19세기 참혹했던 중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중국의 차(茶)가 영국에 소개된 것은 1770년대로 알려지고 있다. 차는 영국 귀족사회를 사로잡았고, 이후 대중에게 보급됐다. 영국의 차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차 무역으로 막대한 적자를 보자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에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편을 판 돈으로 차 값을 지불했다.
청나라의 아편 몰수가 빌미가 돼 일어난 전쟁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1840년 시작된 전쟁은 싱겁게 끝났다. 청나라 군대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조차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백기를 든 청나라는 광저우와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의 빗장을 여는 굴욕을 당했다. 홍콩도 이때 영국에 빼앗겼다.
영국의 욕심은 더욱 커졌다.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한 청나라를 상대로 1856년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2차 아편전쟁에는 프랑스와 미국, 러시아가 참전했다. 넓고 넓은 중국 땅을 나눠 먹기 위해 모두들 숟가락 얹기에 바빴다. 영국 상선 하나 상대 못하는 청나라 군대가 유럽 제국 연합군과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청나라는 아편 무역 합법화, 무역항 추가 개항 등의 내용이 담긴 톈진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베이징에 외국사절단이 체류할 수 있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동교민항 거리가 이때 생겼다. 공사관과 은행, 병원, 우체국 등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문물로 거리가 채워졌다.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의화단운동 등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청 왕조를 되살리기는 어려웠다. 청나라는 결국 1912년 멸망했다. 청 왕조가 무너졌음에도 중국의 시련은 계속됐다. 5ㆍ4운동, 국공내전 등 혼란은 이어졌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됐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문화대혁명은 중국 대륙을 더욱 헐벗게 만들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 세계의 이목이 중국에 집중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중국을 방문, 시진핑 국가 주석과 회담을 가졌다. 양국 정상 간 모종의 합의나 묵인, 또는 베이징 동계 올림픽 기간 중 침공은 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논의는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푸틴은 중국을 떠나면서 천연가스 연 100억㎥ 공급이라는 선물을 줬다. 이 때문인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국의 태도는 애매모호하다. 평화, 자유, 공동의 발전, 일관성, 보편적 규범, 유엔(UN) 헌장, 정치적 해결, 대화, 협력, 인류 공동체 등 그럴싸한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대만 문제를 염두에 둔 자기방어식 논리로 보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벌써 한 달하고도 한참이 지났다. 민간인 사상자가 연일 속출하고 있다. 중국도 이제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더 이상 닳고 닳은 상투적인 말로 우크라이나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
중국은 힘 있는 국가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한 아픈 근대사를 가지고 있다. 힘이 없었기에 중국 근대사는 철저히 유린당했다. 경제만으로는 존중받는 국가가 될 수 없다. 전 세계가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인정할 때 진정한 중화민족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다. 만약 우크리아나에 동교민항과 같은 러시아 거리가 생긴다면 중국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100여 년 전 서구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손가락질을 두고두고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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