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파종과 전쟁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 점령지인 루한스크에서 한 농부가 파종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루한스크(우크라이나)= 타스·연합뉴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 점령지인 루한스크에서 한 농부가 파종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루한스크(우크라이나)= 타스·연합뉴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1812년 4월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위해 60만 대군을 일으킨 뒤 장 라퀴에 육군 장관에게 50일치 식량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6월까지 프랑스와 유럽 각지에 흩어졌던 군대를 폴란드로 규합, 러시아를 공격해 1주일 내로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었다. 전근대시기 유럽에서 이렇게 많은 대군은 동원된 역사가 없었다.


나폴레옹의 대군이 폴란드로 향하는 동안 유럽 각지의 농경지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황폐해졌다. 나폴레옹군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 이동경로에 놓인 나라들에서 강제로 식량과 병사를 징발하면서 파종시기를 놓쳤다. 심지어 종자로 쓸 곡식마저 모두 프랑스군이 약탈하면서 이듬해 농사도 완전히 망쳤다.

프랑스군이 심각한 군량문제에 빠진 것을 간파한 러시아군은 지연작전을 벌이면서 거대한 서부 농토지역 전부를 불사르는 ‘청야(淸野)작전’을 실시했다. 이로인해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9월에 점령했지만 결국 식량이 부족해 철수했고 60만 대군 대부분을 잃는 참패를 겪으며 실각하기에 이른다. 이후 1,2차 세계대전은 물론 현대 주요 전쟁에서조차 파종시기에 전쟁을 하는 것은 매우 금기시됐다.


러시아에서 흔히 ‘조국 수호 전쟁’이라 칭송되는 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담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러시아군이 그대로 겪고 있는 현실이다.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주요 곡창지대가 전쟁으로 봉쇄됐고, 곡물이 집산되던 흑해 연안 항구들이 전부 폐쇄되면서 주요 식료품 물가가 폭등하고 있다. 러시아군 내 식량부족이 얼마나 심각한지 러시아 정부는 각급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초콜렛과 빵을 모아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내라는 지시까지 내린 상황이다.


유럽에서 멀찍이 떨어진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들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파종시기를 넘어 진행되자 벌써부터 악화되는 민심의 추이를 살피고 있다. 지난 2010년 12월 중동 전역에서 독재정권이 도미노처럼 붕괴됐던 ‘아랍의 봄’ 사태가 재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아랍의 봄을 촉발한 직접적인 뇌관은 2010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역대급 가뭄과 냉해로 평가받는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밀 생산이 30% 이상 감축돼 국제 식량가격이 폭등하자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시작으로 대규모 민중시위가 발생했고 중동정권들이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이집트, 시리아 등 주요 중동국가들은 아직도 전체 밀 수요의 80% 이상을 우크라이나 밀 수입으로 충당한다.


이미 우크라이나의 파종 면적이 반토막 났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한동안 기세가 꺾였던 극단주의 테러조직들도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놓친 파종이 새로운 전쟁을 불러오고 있는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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