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 콜롬비아 지폐에 새겨진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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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소리꾼 이자람은 지난해 신작 판소리 ‘이방인의 노래’를 선보였다.


주인공 오메로는 스위스 제네바의 한 병원에서 앰뷸런스 기사로 일하는 카리브해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다. 오메로는 우연히 병원에서 조국의 전 대통령을 만난다. 쿠데타로 쫓겨난 대통령은 치료차 병원을 찾았다. 오메로는 대통령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극진히 모신다. 하지만 오메로의 아내는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쓸데없는 짓 한다며 바가지를 긁는다.

인물 설정만으로 흥미를 끄는 이 판소리의 원작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가 1995년 발표한 단편소설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Bon Voyage, Mr. President!)’이다. 마르케스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콜롬비아 50만페소 지폐에 새겨진 초상 속 인물이 마르케스다.


소설가 권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서 그를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평한다. "마르케스의 책을 읽다 보면 ‘어디서 약을 팔아?’가 어느 순간 ‘이 약, 3개월 할부 돼요’로 바뀐다"고 설명한다. 실제 마르케스의 아버지는 약장수였다. 아버지로부터 이야기꾼에게 필요한 약 파는 솜씨를 물려받은 마르케스도 궁핍한 시절 백과사전을 팔러 다녔다. ‘물에 빠져 죽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등 유난히 긴 마르케스의 소설 제목들도 그의 유머를 보여준다. 마르케스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를 다룬 책의 앞 부분에서 마르케스가 왜 이야기꾼이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마르케스는 7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4명까지 그의 형제는 모두 열다섯이었다. 형제 중에는 뛰어나게 잘 노는 날라리도 있었고, 부모가 소년원으로 보내버린 말썽꾸러기도 있었다. 귀신을 보는 동생, 이식증을 앓는 동생도 있었다. 동생들의 직업도 토목기사, 가수, 소방관 등 천차만별이었다. 대가족 속에서 마르케스는 다양한 삶을 보았고 자신의 소설 속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구현했다.

부모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탓에 마르케스는 7세 때까지 외조부모와 살았다. 마르케스는 외할아버지로부터 1928년 바나나 학살 사건 이야기를 천 번도 넘게 들었다. 바나나 학살 사건은 콜롬비아 북부 시에나가의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자 정부가 군대를 보내 진압한 사건이다. 최대 3000명의 노동자들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는 콜롬비아 역사의 비극이다. 외할머니는 미신과 주술에 빠져 있었다. 권리 소설가는 외할아버지가 들려준 현실과 외할머니의 환상 사이에서 마르케스가 느꼈을 양가감정이 마르케스가 창조한 환상적 리얼리즘의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권리 소설가는 마르케스의 고향 아라카타카를 비롯해 마르케스의 대학 시절을 엿볼 수 있는 보고타, 몸포스, 바랑키야, 카르타헤나 등 마르케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를 70여일간 여행하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오롯이 책 속에 담아낸다. 마르케스가 말년에 쓴 세 권의 자서전을 참고한듯 그에 관한 꽤 상세한 내용들이 기술된다. 마르케스의 소설 속 이야기들을 많이 언급하며 흥미를 더한다. 특히 그의 대표작 ‘백 년의 고독’ 내용을 압도적으로 많이 언급한다. 백 년의 고독을 읽었다면 책을 읽는 흥미는 배가될 것이다.


백 년의 고독에 대해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스페인어로 쓰인 소설 중 돈키호테 다음으로 훌륭하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윌리엄 포크너 사후 최고의 소설이라고 평했다.


마르케스는 소설가이자 기자였으며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피델 카스트로와 오랜 시간 우정을 쌓았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직후에는 취재차 쿠바를 다녀왔으며 카스트로를 모델로 한 소설 ‘족장의 가을’도 썼다. 책에는 콜롬비아의 천일전쟁, 쿠바혁명, 칠레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등도 언급돼 어렴풋하게나마 남미의 역사 흐름도 느낄 수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권리 지음/아르테/1만98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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