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정부의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 입법예고안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아시아경제 김가연 기자] 정부가 낙태죄 처벌을 유지하고 임신 14주까지만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가운데, 낙태죄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낙태죄 존치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면서, 일각에서는 낙태죄를 전면 폐지할 경우 오·남용 소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여성계는 낙태죄 존치는 여성 신체를 통제하려는 것이라며 규탄하고 나섰다.
헌법재판소(헌재)는 지난해 4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처벌하도록 한 형법상 '낙태죄'가 임산부의 자기 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해 위헌이라고 판단하고 오는 12월31일까지 개정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도 지난 8월 여성의 임신·출산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라는 취지로 낙태죄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위원회는 "낙태죄 폐지는 세계적 흐름이다. 여성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임신과 임신 중단, 출산할 권리를 보장하고, 이를 통해 태아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출생·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며 임신 주수에 따라 낙태의 허용 여부를 달리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정부는 지난달 7일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에는 임신한 여성의 임신 유지·출산 여부의 결정 가능 기간을 '임신 24주 이내'로 하되, 임신 14주·24주로 구분해 낙태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개정안에 따르면 여성은 임신 14주 이내에 일정한 사유나 상담 등 절차요건 없이 자기 의사에 따라 낙태를 결정할 수 있으나, 임신 15주∼24주 이내에는 모자보건법에 규정된 낙태 허용 사유에 더해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조건부 낙태가 가능하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임부나 배우자에게 유전적 질환이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성범죄에 따른 임신이나 근친 관계 간 임신, 임부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만 임신 24주 이내에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사실상 여성이 출산을 원하지 않더라도 임신 15주부터는 낙태가 어려운 셈이다.
지난달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낙태죄 폐지 전국 대학생 공동행동 학생들이 낙태죄 완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렇다 보니 낙태죄를 존치하는 정부 입법예고안을 둘러싼 시민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낙태죄를 찬성하는 일부 시민들은 "낙태죄 전면 폐지가 낙태죄 오·남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여성들은 "임신 중단이 신체적 부작용을 동반하는 등 여성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오·남용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이같은 주장 자체가 여성의 자기결정권, 생존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라며 반발했다. 임신 중단을 '태아살해' 등 여성에게 죄책감을 지우는 행위가 아닌 의료 서비스의 개념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그러나 낙태죄를 전면 폐지한 다른 나라의 경우 '낙태 오·남용' 현상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캐나다는 지난 1988년 이후 낙태죄를 전면 폐지했으며, 프랑스는 지난 9월 하원에서 여성의 심리·사회적 고통에 따른 임신중지를 임신 기간 내내 허용하는 생명윤리법 개정안(les Lois de Bioethique)을 통과시켰다.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지난 8월 기자회견에서 "1988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 이후 낙태죄를 전면 비범죄화한 캐나다의 임신 중단은 전체의 11%이며 대부분 12주 내에 이루어지며 임신 21주 후 임신 중단은 0.7%"라며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른 제한 등 규제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으나 이는 과도한 입증 과정과 절차를 요구해 임신 중지 시기를 늦출 뿐이며 여성을 더 열악한 환경으로 몰아넣는다"고 강조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 9월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낙태죄' 완전 폐지 촉구 기자회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소재의 한 여대에 재학 중인 대학생 A(24) 씨는 "낙태를 전면허용한다고 해서 모든 임산부를 강제로 수술받게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여성들에게 자신의 신체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라며 "낙태죄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왜 여성은 생명으로서 존중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직장인 B(29) 씨도 "임신 중단을 오남용 할 수 있다는 발상부터 말이 안 된다"면서 "과거 여아 낙태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기 위해 오남용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끔찍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낙태죄로 여성을 범죄자로 만들겠다는 정부는 여성을 인간이 아닌 출산의 도구로서만 보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달에는 낙태죄 전면 폐지를 촉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게시된 바 있다. 해당 청원은 지난 3일 10만 명 이상 동의를 받아 청원 요건을 충족했다.
여성계는 낙태죄를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 및 신체 통제로 규정하고, 전면 폐지를 촉구했다. 모낙페는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들의 (낙태죄 관련)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정부의 형식적인 명분 쌓기용 자리가 반복되고 있다"며 규탄했다.
김수경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여성국장은 "정부는 여성들의 임신중지가 안전과 생명권의 문제임을 간과하고 있다"면서 "복지부는 여성계의 의견을 들었다는 구실을 통해 또 한 가지의 (보여주기용)보고서를 만드는 용도로 우리를 활용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전국 20여개 대학의 페미니즘 동아리가 모인 '160만의 선언 낙태죄폐지전국대학생공동행동' 또한 지난 7일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낙태죄 마침표' 집회를 열고 "낙태죄는 여성을 죄인으로 만드는 낙인이다.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죄를 묻는 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김영우 공동행동 집행위원장은 이날 "역사적으로 낙태죄는 국가의 인구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정부 계획에 따라 가변적으로 적용됐다. 여성은 자율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을 위한 도구, 형사처벌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해왔다"고 주장했다. 또 "문재인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가 유지하겠다는 선포"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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