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일에서 만큼은 '오지라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나한테 주어지는 일만 하고 끝내는게 아니라, 일을 준 주체가 해야할 고민을 나도 하고, 다른 분야에서 해야할 걱정도 내가 하고, 그렇게 하나의 일이 구멍없이 촘촘하게 엮어질 수 있게 긴 시야와 안목을 갖췄으면 합니다."
◆"오지라퍼 되라" = SK텔레콤의 인공지능(AI)서비스사업단 사령탑 이현아 SK텔레콤 단장(사진)의 당부다. 초(超)'협력'과 ICT'융합'의 시대. 분야별로 칸막이를 나누고 하나의 영역만 파서는 한계에 부딪힌다. "구성원 모두가 오지라퍼가 돼 업무의 덩어리가 겹치고 겹치도록 해야 결함이 없고 완결성이 있는 서비스가 태어난다"는 것이 이 단장의 모토다.
2016년 10월. 10년간 몸담았던 네이버에서 SK그룹으로 둥지를 옮겼다. 곧바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을 AI(인공지능)플랫폼 시장에 뛰어들었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AI플랫폼 누구(NUGU)를 출시해 반향을 일으켰다. 애플이 아이폰 시리(Siri)(2011년), 구글이 구글 나우(2012년), 아마존이 알렉사(2017년)을 선보였지만, 국내 시장은 불모지나 다름 없던 때였다.
누구는 출시 2년만에 월간 실사용자(MAU) 400만명을 육박했고, 내비게이션(T맵)과 셋톱박스(BTV), T전화로까지 전선을 확대하며 AI서비스시장의 판을 흔들었다. 이 단장이 직접 모든 고객의소리(VOC)를 꼼꼼하고 세심하게 챙겨가며 보완점을 해결해나갔다. 이 단장은 "결국 엔드픽처는 플랫폼"이라면서 "티맵이나 T전화 등 고객 터치 포인트에 AI가 들어가 플랫폼을 확대하고 다양한 버티컬 비즈니스와 연계해나가고 싶다. 결국 'AI 에브리웨어'를 꿈꾼다"고 말했다.
◆시장 최전선으로 = 이현아 단장은 1995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입사 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정부 프로젝트였던 '21세기 세종계획'에 일원으로 참여해, 2억 어절의 말뭉치(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도록 입력, 저장한 어절 묶음)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 기계가 인식할 수 있는 언어 정보를 자동처리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인공지능(AI) 음성인식 기술의 '0' 지점부터 커리어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다 ETRI에서 나와 기업으로 옮기는 '선택'을 한 것은 이 단장의 삶에 중요한 궤적이자 단초가 됐다. 1997년 '여성이 다니기 최적의 직장'이라고 불리던 정부출연기관(정출연)을 나와 민간 기업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례적 도전이었다. 지금처럼 음성인식이 고도화된 시기도 아니었고, ARS나 콜센터 처럼 음성인식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 때 였다. 그야말로 '베팅'처럼 보이는 선택이었다. 이후 SnL, L&H, 보이스텍, 코아보이스 등 음성인식 전문기업에서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좋은 직장 두고 왜 사서 고생하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으로 옮기게 된 계기를 묻자 이 단장은 "커머셜(시장)에서 일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정출연에서 기술이전을 하는 일도 의미가 있었지만, 시장에서 실제 상용화를 하고 서비스를 써본 고객들과 만나고 싶었다는 것. 이 단장은 "음성인식, 합성 같은 기술은 상용화하면서 더 많이 발전하고, 소비자 피드백을 받으면서 굉장히 재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자들의 생생한 데이터를 만나고 싶었다. 필드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 단장은 특히 "일을 하면서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공부를 이만큼 했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고 내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해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 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에 '성별'이 개입할 여지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일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로드맵이었다"고 역설했다.
◆고비는 슬기롭게 = 기업으로 옮긴 후 '고비'가 없지 않았다. 스마트폰과 딥러닝이 있기 전 2001~2002년대 음성인식 기술은 현재와 견줘보면 조악했다. 소비자 기대는 높았지만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결국 1999~2000년대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부흥하던 음성인식 기술은 2000년에 들어와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한다. 인생을 걸고 도전했던 산업 분야의 '한계치'를 극명하게 봤던 순간이다. 그 시점을 기해 회사도 어려워졌지만 크게 흔들리진 않았다. 그는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되뇌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어려움만 나에게 온다고 믿었고, 지나고 보면 늘 그게 맞았다"고 했다.
실제 2010년께 스마트폰 시장이 부흥하고, 딥러닝이 시작되고 마이크 성능까지 개선되면서 음성인식 기술은 퀀텀점프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이 단장은 2010년 네이버에서 '음성검색'기술을 개척하고 2016년 SK텔레콤에서 AI플랫폼 누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는 "음성인식은 디바이스 의존도가 높다보니 2000년대 초반에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지만,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면서 "어쩌면 굉장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고, 변화에 이끌렸기도 했고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몰입하고 체력 키워라" = 여러 직(職)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왔지만 업무에 있어 이 단장이 결국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몰입'이다. 승진을 목표로 삼았던 적도 없었고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일한 적도 없이 순수하게 맡은 분야를 최고의 품질로 만들려고 하다보니 오늘날의 자리에 왔다. 그는 "주어진 업무를 최대한, 최고치로 하려고 하다보면, 그것을 인정해주는 상사나 경영진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직함이 따라왔던 것 같다"고 했다.
이 단장에게 미래 여성 리더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체력관리를 꼭 하라고 당부드리고 싶다"며 운을 뗀 그가 말을 이었다. "여성들에겐 퇴근하고 나서도 집이 쉬는 공간이 아니라 가사 일을 해야 하는 공간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출산도 육아도, 가사노동도 쉽지 않은 일이다. 중도이탈을 하는 여성들을 보면 대부분 체력 때문에 무너지게된다. 하지만 그렇게 주저앉을 수 없다. 롱런해야 한다. (여성 후배들에게) 체력 안배를 하기 위해서 모든 자기관리 활동을 가장 욕심 있게 하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 단장의 멘토는? '전폭적 지지' 보내는 상사...박정호 SK텔레콤 대표
"당신은 나에게 파워풀한 장수다. 이길 수 있는 명장이 되라."
멘토를 묻는 질문에 이현아 SK텔레콤 AI서비스단장은 박정호 SK텔레콤 대표가 한 말을 들려줬다. 이 단장은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을 심어주는 상사와의 관계가 가장 큰 멘토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CEO에게서 '장수'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정말 장수가 된다는 투지를 세웠고, 장수로서 힘이 되어야 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박정호 대표는 이현아 단장이 이끄는 AI서비스단에 무한 신뢰와 지지를 보내고 있다. 지난해 말 조직개편에서는 AI센터에서 AI서비스플랫폼단을 분리, CEO 직속으로 이현아 단장이 이끄는 AI서비스단을 편제한 것도 AI 사업화에 대한 '선택과 집중' 차원이었다는 게 SK텔레콤 안팎의 평가다. 이 단장은 "회의 때마다 자주 '장수가 되라'는 말씀을 하셔서, 사업을 진행할 때 어려운 점이 있으면 항상 그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면서 "나는 '장수'가 이미 됐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실제 SK텔레콤이 추구하는 ICT회사로의 변모와 혁신, 탈(脫)통신 신산업화의 중심에 AI서비스단이 자리한다. 지난 20일 열린 '누구 컨퍼런스 2020'에서 박 대표는 "국내 AI로서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자부한다"며 AI서비스단에 강한 신뢰와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 단장은 2016년 SK플래닛 입사 후 4년간이 직장생활 25년 중 그 어떤 기간보다 밀도 높이 달려온 시간처럼 느껴진다. AI서비스 분야에서 공격적으로 시장 개척을 하고 있기에 ICT 회사에서 신산업의 최전선을 진두지휘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매일 출근한다. 그는 "4년이지만 플러스 10년해서 14년의 시간을 보낸 것 처럼 느껴진다"면서 "CEO의 신뢰와 믿음이 뒤따르다보니 많은 고민과 많은 변화를 짧게 가져가면서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앞으로도 AI 에브리웨어를 위해 전력질주할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현아 SK텔레콤 AI서비스단장 프로필]
▲1995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입사 ▲1999년 SnL 연구원 ▲2000년 L&H 과장 ▲2001년 보이스텍 연구원 ▲2004년 코아보이스 연구원 ▲2006년 네이버 수석부장 ▲2016년 SK플래닛 컨버세이셔널 커멀스본부장 ▲2017년 SK텔레콤 AI기술2본부장/유닛장 ▲2019년 SK텔레콤 AI서비스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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